6.태화강과 풍수해

▲ 1967년 태화강 제방 수해 장면.

남구와 중구 경계를 흐르는 태화강변에는 울산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데 본격적인 시가지 개발이 시작되기 전인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중구 반구동과 학성동 일대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았었다는 사실은 당시 호적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배수 펌프장 시설이 없었던 그 시절, 태화강변 가까이서 살았던 이들은 어떻게 홍수를 견뎌냈을까. <울산광역시사>에 실린 ‘울산사 연표’에 의하면 조선 태종5년인 1405년 7월 29일자로 홍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나타나고, 태풍 기록은 세종10년(1428년) 5월 3일에 보인다. 그런데 가을은 고사하고 초여름인 양력 6월 15일에 피해를 입힌 것이 과연 태풍일까 살짝 의문도 든다. 그러나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기에 기록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시간이 한참 흘러서 1920년이 되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일간지가 창간되는데 이들 신문기사를 통해 당시의 풍수해를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을축년 대홍수’부터 살펴보자. 을축년인 1925년에는 한 해 동안 4차례나 태풍과 열대성 저기압이 우리나라를 지나가면서 큰 피해를 입혔다. 울산의 경우는 그 중 4번째에 해당하는 9월 6일 들이닥친 태풍으로 인해 밤 9시부터 7일 아침 7시까지 계속된 폭풍우와 해일로 큰 피해를 입었다.

1405년 최초의 홍수 기록 남아있어
을축년 1925년 한해동안 4차례 태풍
울산은 4번째에 해당하는 9월 큰 피해
홍수방지 제방 축조후에도 수해 여전

1959년 태풍 ‘사라’로 추석날 큰 피해
1969년 이틀간 495.4㎜ 폭우 쏟아져
1991년 ‘글래디스’땐 545㎜ 최대기록
대도시가 된 울산의 치산치수 큰 과제

당시 이 태풍은 60년 만에 가장 강력한 것으로 “울산읍내 시장부근 일대의 가옥 100동이 침수되고, 전괴가 3동, 창고 피해도 4동이었다. 언양은 남천강이 범람 위험에 처했고, 장생포는 해일로 경찰관 주재소가 유실되고, 기선 3척이 피난했다. 방어진은 가장 피해가 커서 어선 파손 50척, 사망자 1명, 육상 가옥 전괴가 20동이나 되었다. 당시 바람이 아주 심해서 기와가 날아가고 많은 집이 무너졌다고 한다. 또한 홍수가 나서 교통이 두절되고 농작물은 전멸되었는데 태풍 이틀 후인 9일자 신문에도 피해 정도는 알 수 없다”(동아일보 1925년 9월 9일자)고 보도하고 있다.  

▲ 2009년 태화강.

한편, 거금을 투자해 만든 홍수 방지용 태화강제방 축조 후에는 사정이 어떻게 변했을까. 동아일보 1933년 7월 5일자 기사에는 “울산지방에는 3일 밤부터 또 비가 나리어 태화강 물이 증수되는 중인데 금조부터 기차, 자동차 전부가 통행하지 못하고 전부 두절되었는데 4일 오전 9시까지 계속하야 나리는 중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같은 해 9월 6일자 동아일보는 “지난 3일 오후 8시경부터 오기 시작한 비가 폭풍을 섞어 나려 쏘다저 4일 오전 10시까지 101mm의 비가 와서 태화강이 범람하고 울산 앞 평야는 거의 물의 바다로 되고 그 우에 바람이 심하야 농작물은 거의 전멸 상태이며 기차 자동차 등이 모다 불통하야 울산의 인심은 자못 흉흉한 가운데 있다”고 전하고 있다.

1925년처럼 1933년에도 홍수 피해가 잦았다. 앞서 태화강이 범람하고 불과 2주가 지난 9월 18일에 또 태풍이 들이닥쳐 울산은 큰 피해를 당해야 했다. 같은 동아일보 기사에 “18일 밤 10시부터 폭풍우가 내리기 시작하야 20일 아침까지 그대로 계속하야 강우량은 284mm를 돌파하엿고 바람은 20m로 맹렬히 부는 중인데 태화강이 범람되고 평야는 물바다로 화하였다. 농작물은 전멸상태이고 침수된 가옥도 수 백호인데 기차, 자동차 등은 전부 불통중이고 피해액은 방금 조사중인바 지금(오전 8시반)도 비바람은 계속 중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앞의 글에서 언급하였듯이 이 기사를 보면 태화강에 제방이 축조되고 나서도 여전히 농지가 물에 잠기고, 특히 기차와 자동차 같은 교통수단 피해가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해방 후가 되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가장 유명했던 14호 태풍 사라는 1959년 9월 17일 추석날 들이닥쳤다. 그날 사라는 한반도 남부를 강타해서 제주, 전남, 경남, 부산 등지에 큰 피해를 입혔다. 당시 중앙관상대는 추석 전날인 16일 오전 9시에 태풍 경보 1호를 내면서, “우리나라에는 태풍이 상륙하지 않고, 많은 비도 안 내리며 추석날에는 보름달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라는 추석날인 17일 새벽에 남해안에 상륙해서 오후 2시에 울산을 통과했다. 이 태풍은 최대 풍속 85m의 엄청난 강풍과 폭우를 동반했고, 해일까지 겹쳐서 전국적으로 사망·실종 924명(역대 3위), 이재민 98만여명이 발생했고, 재산피해는 2003년 가치로 2490억원이 넘었다.

사라로 인한 울산지역 피해도 컸지만 상세한 피해규모는 알 수 없다. 다만 1931년 말에 수리조합사업으로 조성되었던 태화강 제방이 처음으로 허물어지면서 삼산동과 달동 일대가 수몰되어 호수처럼 변했고, 추석 차례 준비를 하던 아침부터 폭풍우가 몰아쳐서 난리도 아니었다는 증언을 들었다. 필자의 집도 이 태풍으로 헛간이 내려앉고 담장이 무너졌다고 전해들었다.

필자가 기억하는 가장 큰 울산지역 홍수 피해는 1969년의 일이다. 이 해 9월 14일과 15일 이틀에 걸쳐 울산에는 495.4mm의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이웃 양산은 627mm가 쏟아져서 전국 최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처럼 1969년의 물난리는 태풍이 아닌 호우가 원인이었다. 울산은 중구 학성동, 성남동 등 중심가 8개 동의 2000여 가구가 완전히 침수되어 사망 4명과 실종 18명의 인명피해를 입었고, 이재민은 무려 1만 3172명이나 되었다. 15일 정오에는 태화강 홍수경보가 발령돼 다음날 정오에 해제되었다. 9월 15일자 경향신문 기사에는 “시내 곳곳의 저지대에 있는 공장과 고속도로 공사장의 중장비들이 침수, 큰 피해를 냈는데 통신과 교통이 15일 정오 현재 모두 두절되고 있어 피해상황은 집계되지 않고 있다. 시내를 흐르는 태화강은 15일 정오 현재 위험 수위 5.16m를 훨씬 넘어 8.66m에 이르고 있어 당국은 전 시민들에게 고지대로 긴급 대피토록 명령했으며 울산경비사령부는 육본에 헬리콥터 2대를 지원 요청했다”고 다급한 상황을 알리고 있다.

이후 큰 태풍 피해 없이 1970년대가 지나가고 1982년 8월 14일에 태풍 ‘세실’이 상륙해서 또 다시 전국을 강타했다. 인명피해 106명, 가옥피해 2293채, 이재민 6285명이 발생했다. 울산에도 이날 하루 동안 강풍과 함께 216.9㎜의 폭우가 쏟아졌다. 문제는 중구 구시가지 침수였다. 200㎜를 조금 넘는 비였지만, 구시가지 일대가 완전 침수됐다. 원인은 정전이었다. 강풍으로 전선이 끊어지면서 구시가지 일대가 정전되었고 이 정전으로 인해 반구동 배수장의 양수펌프 모터가 멈추어버린 것이 원인이었다.

이로부터 만 9년 후인 1991년 8월 22일과 23일에 걸쳐 이번에는 태풍 ‘글래디스’가 우리나라를 덮쳤다. 전국적으로는 사망 74명, 실종 29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가운데 영남지역 제조업체 피해가 1400억원에 달했다. 울산지역에는 1969년 호우 이후 최대 강우량을 기록했는데, 이틀 동안 전국 최고인 545mm의 비가 내려 23일 오후 5시쯤 태화강 제방을 50cm 남긴 5.15m 높이까지 물이 차올랐다가 다행히 오후 7시부터 수위가 내려가기 시작해서 위기를 넘겼다. 이 때문에 삼산들에서 모두 2497가구 81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이 가운데 1000여 가구는 처음에 대현중학교로 대피했으나 침수위험이 닥치면서 강남초등학교로 2차 대피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한삼건 울산대 디자인·건축융합대학장

2000년대가 되면 태풍은 더욱 위력이 높아져서 피해도 커졌다. 2002년 8월 31일에 상륙한 루사는 역대 태풍 가운데 재산피해 1위와 1일 최대강우량 기록을 세웠다(강릉지역 870.5mm). 울산 역시 태화강에는 홍수경보가 내려졌고, 웅촌면 초천리에서는 회야강을 건너던 자동차가 물에 휩쓸려 사망사고가 나고 예전부두에 있던 국제여객선 터미널에서는 잔교가 피해를 입기도 했다. 같은 해 9월 12일에 상륙한 태풍 매미는 사라처럼 추석연휴 마지막 날에 피해를 입혔다. 풍속은 역대 태풍 1위를 기록했고(제주 산간 60m), 재산피해액은 역대 2위였다. 울산에서는 최악의 정전사태를 일으켜서 많은 공장이 가동을 멈추었고, 고층 아파트 유리창 파손 피해가 컸다. 2006년의 태풍 에위니아는 태화강 상류지역에 주로 피해를 입혔고, 태화강 둔치가 침수되었다. 다시 6년 후인 2012년 9월 17일에는 태풍 산바가 상륙해서 237mm의 비를 뿌리면서 태화강에 홍수주위보가 내려지고 또 다시 둔치가 침수되었다.

이처럼 과거의 홍수 기록을 보면 200mm 정도의 집중호우가 내리면 태화강 둔치가 물에 잠기고, 강변 저지대는 침수 피해를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도시가 되어버린 현대 울산의 치산치수(治山治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던져진 큰 과제다. 사진=서진길 울산예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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