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고태진과 울산 상업은행

바늘구멍 뚫고 부산제2상고 입학
‘고을의 경사’였던 은행 취직 성공
이후락 비서실장 추천으로 서울 진출
상업은행 상무-제일은행 전무 거쳐
1972년 조흥은행장까지 승승장
 

 

울산시 중구 성남동 ‘문화의거리’에는 오랫동안 비어 있는 고층 건물이 있다. ‘크레존’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건물은 10여 년 전 영화관으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이 건물은 건물주와 땅주인이 서로 달라 지금까지 한 번도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고 빈 건물로 남아 있다.

이곳에는 크레존이 들어서기 전 상업은행 울산지점이 있었다. 상업은행은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한일은행과 합병하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울산금융의 중심 역할을 했다. 상업은행이 울산에 지점을 개설한 것은 1914년이었다. 울산에는 이보다 앞서 1907년 울산금융조합이 설립되어 농민들을 상대로 여수신업무를 했다. 그러나 금융인들은 자금 액수와 여수신 방법을 볼 때 상업은행을 근대 울산금융의 효시로 본다. 상업은행은 개원 후 방어진에 일본의 대형 수산업체인 하야시가네(林兼)가 들어와 방어진 경제가 활성화되자 출장소를 두기도 했다. 방어진 출장소는 방어진 해안의 어업조합 건물 인근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상업은행에서 근무했던 행원으로는 고태진, 김홍기, 안덕만씨가 있었다. 이들 3명은 모두 부산제2상고(현 개성고)를 나왔다. 당시만 해도 한국인이 행원이 된다는 자체가 어려웠지만 부산제2상고 입학도 쉽지 않았다. 당시 부산제1상고는 나중에 경남상고가 되는데 이 학교는 일본인 학생들이 다녔기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 후 금융인이 되기 위해 울산 학생들이 갈 수 있는 부산의 제일 좋은 학교가 부산제2상고였다.

그런데 이 학교 입학이 바늘구멍이었다. 일제강점기 울산 초등학교의 경우 한 학년이 각각 70여명 2개 반이었는데 이중 한 반은 전체가 남학생이었고 나머지 한 반은 남학생 30여명, 여학생 40여명으로 짜여졌다. 그런데 이들 두 반에서 졸업 후 부산과 대구로 진학하는 학생들이 10여명밖에 못되었다. 

▲ 1913년 건립된 후 울산 금융의 중심 역할을 했던 울산 상업은행(사진 위) 자리에 10여년 전 영화관 건물 ‘크레존(사진 아래)’이 들어섰으나 건물 주인과 땅 주인의 이견으로 아직 영화관이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울산 출신의 금융인들 중에는 상업은행 울산지점을 거쳐 간 인물들이 많다.

따라서 부산제2상고에 합격하면 신문에 이름이 실릴 정도였다. 부산제2상고에서 은행 취직은 더욱 힘들었다. 전체 졸업생 중 성적이 좋은 10여명 정도만 은행에 취직되었다. 따라서 은행 취직은 개인의 영광이요, 학교의 자랑이었고 고을의 경사였다.

해방 전 상업은행에 근무했던 고태진씨의 경우 당시 부친 기업씨가 울산을 대표하는 유지였고 김홍기씨 역시 부친이 월내에서 멸치 어장을 경영하는 부자로 형이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을 다녔다. 안덕만씨 역시 부친이 북정동 입구에서 큰 포목상을 운영해 재정이 든든했다. 안씨는 4명의 형제 중 둘째였는데 형 흥만씨가 해방의 소용돌이 속에 월북했고 바로 아래 동생 성만씨는 울산에서 자동차학원을 운영해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김영삼 정권 때 법무부 장관을 지냈던 안우만씨가 그의 막내 동생이다.

1920년생인 고태진씨가 상업은행 울산지점으로 온 것이 그의 나이 19살 때인 1939년이었다. 그는 부산제2상고 졸업 후 일본 아오야마(靑山) 대학을 다녔는데 대학 2학년 때 학도병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부친 기업씨가 일본에서 데리고 나와 부산의 상업은행 동래 지점에 취직시켰다.

동래 지점에서 곧 울산 상업은행으로 온 그는 대리가 되었다. 그가 울산으로 올 때 울산 상업은행의 경우 지점장은 일본인이었고 차장직이 없어 대리 권한이 컸다. 당시 은행 대리의 수입은 논 100마지기를 가진 농가와 맞먹었다. 당시만 해도 논 30여마기만 가져도 농촌에서는 부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따라서 울산 전체를 보더라도 논 100여마지를 가진 농가가 많지 않았다.

당시 은행은 요즘에 비해 문턱이 낮았다. 예로 울산장이 열릴 때면 농민들 중 소를 팔기 위해 장에 왔다가 소가 팔리지 않을 경우 소를 담보로 은행에 맡겨 놓고 돈을 빌려갔다가 다음 장날 소를 팔아 돈을 갚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은행은 소에게 먹이를 줄 사람을 따로 두어야 했다. 그리고 농민에게 빌려준 돈을 받을 때는 대여금 외에도 소 먹이와 관리비까지 따로 계산했다.

또 당시만 해도 은행은 대출 못잖게 재원 조성을 위한 수신업무가 중요했다. 따라서 장날에는 은행 직원이 밤늦게 대형 상점이 문을 닫을 때까지 상점 앞에서 기다렸다가 돈을 가져와 은행 금고에 넣기도 했다.

울산 상업은행 출신 인물 중 금융인으로 가장 출세한 사람이 고태진씨다. 고씨는 울산에서 2년간 근무하다가 해방 후 1953년 대전지점장, 1957년 진주지점장, 1961년에는 심사과장을 거쳐 부산 중앙동지점장이 되었는데 그에게 행운의 기회가 온 것이 이 무렵이었다.

이 때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었던 이후락씨가 울산 출신의 금융인 중 국고를 맡길 인물을 찾게 되는데 이 때 고씨가 발탁되었다. 따라서 고씨는 이 실장의 추천으로 곧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 건설부 자금을 관리했던 상업은행 용산지점장이 되었다. 이후 상업은행 남대문지점장으로 잠시 근무했던 그는 1967년에는 상업은행 상무가 되었고 2년 뒤에는 이 실장의 지원 속에 제일은행 전무가 되었다. 그리고 1972년에는 조흥은행장을 맡은 후 1973년에는 대한축구협회 제33대 회장이 되었다.

해방 후 울산에는 금융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민주당 시절 국회의원을 지냈던 오위영씨는 신탁은행 두취(은행장)를 지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조흥은행은 울산과 인연이 깊다. 고씨보다는 늦지만 1943년 울농 졸업 후 조흥은행에 입행했던 최석황씨는 부산에서 주로 행원생활을 한 후 1969년 조흥은행 상무가 되었고 이 보다 늦은 1956년에 조흥은행에 입행했던 송기태씨도 서울상대 졸업 후 1983년에는 조흥은행장이 되었다. 1941년 부산제2상고를 졸업했던 김남식씨도 그해 상업은행에 입행한 후 1962년 지점장, 1968년 동대문 지점장을 거쳐 1969년에는 상무이사가 되었다. 또 권경수씨도 부산제2상고를 졸업한 후 1945년에 상업은행에 들어가 1983년에는 상무가 되었다.

따라서 1960년대 후반이 되면 재경 울산 출신 금융인들이 매년 모임을 갖고 버스를 대절해 강원도 월정사와 강화도 등 야유회를 가기도 했는데 이때면 울산 출신 금융인들 대부분이 모였다. 이때만 해도 금융인들의 힘이 세어 금성과 삼양사 등에서 푸짐한 상품을 경품으로 내어 놓았다.

연령적으로는 고태진씨가 이후락씨보다 4살이 많았지만 이 실장은 고씨가 상업은행 상무와 제일은행 전무, 조흥은행장 등 금융계 고위직을 거치는 동안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해 둘 사이가 가까웠다.

언양과 울산을 잇는 고속도로가 개설된 것 역시 둘의 힘이 컸다. 고씨에 따르면 60년대 말 새벽에 이 실장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 “고향 울산에 가장 시급한 일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래서 고씨는 “울산이 공업도시가 된 후 산업물량이 갑자기 늘어났지만 경부고속도로가 언양을 통과하기 때문에 공단에서 멀어 공장들이 물량을 운반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 실장이 한신부동산에 얘기해 서울신탁자금으로 공사를 시작해 1969년 울산~언양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고 행장과 이 실장은 모두 고래고기를 좋아해 울산에서 맛있는 고래고기가 서울에 배송되면 서로 만나 함께 먹는 일이 잦았다. 실제로 60년대만 해도 서울에는 고래고기를 따로 파는 상점이 없었다. 그런데 70년대 초 어느 날 둘이 만나 울산에서 배송되어 온 고래고기를 먹은 후 남산 팔각정에 올랐는데 이 때 이 실장이 서울시 야경을 내다보면서 고 행장에게 “옛날에는 서울에 와도 아는 사람들이 없어 갈 곳이 없었는데 고 행장이나 나나 이제 서울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하니 울산 촌놈들이 서울까지 와서 출세를 한 것이지요”라고 말해 둘 모두가 웃었다는 일화가 아직까지 전해오고 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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