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호주제 폐지에 대한 찬반양론이 격렬하게 불붙고 있으며 마치 목숨이라도 내걸듯이 자못 그 양상이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다.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사안에 대하여 가타부타 말하는 것이 자칫 원하지 않는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기에 참으로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종교인이라고는 하나 생물학적인 여성이라는 성을 벗어날 수 없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래 마음인 성품에는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없음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글을 진행하고자 한다.  며칠전 여권이 만기가 되어 기한을 연장하러 시청에 들렀다. 그런데 기한 연장은 안되고 재발급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신청용지에 빈칸을 기재하고 채워가는데 호주의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적을 부분에서 멈추게 되었다. 출가하여 30여년 가까이 원불교 교역자로 생활하다 보니 사가의 생활과 인연에 대하여는 자연 소홀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기에 호주라는 말이 왠지 낯설게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몇 번의 전화통화 후에 호주에 관계된 빈칸을 채울 수는 있었지만 사가를 떠나 공가에서 지낸지 수십 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호주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사실 나의 이러한 경험은 모든 국민들이 겪는 일상사로서 남녀를 물론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소한 일에 속한다. 그런데 여기 저기서 들려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면 그저 지나치기에는 가슴아픈 사연들이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특히 요즘 이혼율이 높아져 결혼하는 4쌍중의 1쌍이 이혼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이혼한 가정의 자녀 호적문제와 성문제가 그 중의 하나이다. 이혼한 여성이 자녀를 양육할 권리를 가지고 실제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도 여전히 자녀들은 아버지의 호적에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아이가 커서 학교에 들어가거나 호주의 동의가 필요한경우에는 참 난감한 경우가 생길 수 있음을 짐작케 한다.  또한 이혼한 여성이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를 키우다 재혼할 경우 아이가커서 자기의 성이 같이 살고 있는 새아버지의 성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겪게되는 정신적인 혼란과 정서적인 충격은 아이의 성장에 결코 긍정적인 결과를 주지는 못할 것이다.  원불교에서는 창교당시인 일제시대 때부터 남녀권리동일조항을 밝히고 있다. 여자는 어려서는 부모에게,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자녀에게 의지하는 삼종지덕의 병폐와 남자와 같이 교육을 받지 못하고, 사교의 권리도 얻지 못하며, 재산의 상속권도 얻지 못하며, 자기의 심신이지만 모든 행동에 구속을 면하지 못하였음을 지적하면서 남녀가 다함께 자력을 양성할 것을 가르치셨다. 이와 같이 일찍이 남녀의 평등한 삶을 교육받으며 원불교 교단 내에서 살아왔던 터라 남녀불평등에 대한 문제에 오히려 관심이 소홀하였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남녀의 평등한 삶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어리석은 질문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남녀가 왜 평등해야만 하는가 하는 근거를 대라고하면 멈추어 따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진리를 깨달은 성현들은 하나같이 말씀하신다. 본래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여자와 남자를 구별하는 생물학적인 특성을드러내는 이 몸뚱이가 본래의 나의 모습인가? 이 몸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남녀라는 구별도 없고, 구별이 없기에 차별이나 평등이라는 말조차도 필요 없는 우리의 본래마음 곧 성품이 우리의 본래모습이라고.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