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신라왕실이 주목한 종교문화 성지

▲ 천전리각석에 새겨진 명문 탁본. 각석 하부에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선각화와 명문이 뒤섞여 있는데, 명문 가운데 확인되는 글자는 800자가 넘어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천전리 서석에는 신라 왕실의 인명이 새겨져 있다.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 514~540년 재위), ‘심맥부지’(深麥夫知, 진흥왕의 이름, 540~576년 재위), ‘사부지갈문왕’(徙夫知葛文王, 법흥왕의 동생인 立宗), ‘어사추녀랑’(於史鄒女郞, 입종갈문왕의 누이), ‘지몰시혜비’(只沒尸兮妃,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 ‘부걸지비’(夫乞支妃, 법흥왕비인 보도부인)와 ‘법민’(法敏, 문무왕의 이름, 661~681년 재위) 등이 새겨져 있다.

신라의 관등명도 보인다. ‘파이간지’(波干支, 4위), ‘일길간’(壹吉干, 7위), ‘사간’(沙干, 8위), ‘거벌간지’(居伐干支, 9위), ‘나마’(柰麻, 11위), ‘대사’(大舍, 12위), ‘소사’(小舍, 13위)와 중앙 관료인 ‘대등’(大等)도 있다.

신라의 왕실 인물들과 중앙관료들이 이곳에 와서 제의를 거행했음을 보여주는 내용도 있다. ‘다살’(多煞)과 ‘작식인’(作食人)이 그것인데, 다살은 희생물을 바치는 제의를 거행했음을 알려주며 작식인은 음식을 만든 부인들이 함께 참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신라의 왕실 인물들과 중앙관료들이 천전리에 와서 국가적인 중대사와 관련한 제의를 거행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다양한 종교 한자리에 어울려 제례의식 지내던 종교적 성지
법흥왕·진흥왕 등 불교 제의 드린 기록 서석에 새겨져 있어
국력 결집을 위해 새로운 종교이념인 불교 국교로 성장시켜

천전리는 대곡천의 맑은 물이 흐르는 큰 골짜기이며 이는 동해로 흘러 바다와 통한다. 예로부터 골짜기는 생명의 바람이 일어나는 곳이며, 물이 위에서 아래로 순리에 따라 흐르는 곳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곳은 하늘, 산, 바위, 물이 만나는 곳이다. 이곳에는 호랑이, 사슴, 고래, 물고기, 새, 용, 사람얼굴 기하문, 세선화(細線畵) 등도 새겨져 있다. 이들은 산짐승, 들짐승, 바다짐승, 물짐승, 하늘짐승들이며 사람과 자연현상 그리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들이다. 단단한 바위에 이러한 형상과 글을 새긴다는 것은 영원을 향해 각인하는 것이며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고픈 소망을 가지고 이곳에서 제의를 거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이러한 동물들을 주관하는 산신, 용왕, 천신(天神), 해신(海神), 조상신에 대한 제의가 거행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는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지나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각 시대의 절실한 소망을 담아 새긴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 소망은 생명과 직결되는 수렵, 어로, 농경생활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곳은 오랜 시간에 걸쳐 새롭고 다양한 종교들이 생존과 관련한 절실한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함께 자리해온 ‘한국 종교문화의 성지(聖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대대로 살아온 천전리 주민들은 긴 역사 속에서 절실한 소망을 담은 제의를 통해 여러 문제를 해결하면서 다양한 종교체험을 하였다. 그러면서 또한 자연스럽게 여러 종교를 포용하면서 살아왔다. 천전리는 한국의 조화로운 종교문화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 울주 천전리각석 명문 부분 암각화.

이렇게 볼 때 신라 왕실이 천전리를 주목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이곳은 오랜 시간을 이어온 종교적 성지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곳은 다양한 종교가 한자리에서 어울려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셋째, 이곳은 조상대대로 간절한 소망을 담아 제의를 거행한 곳이기 때문이다. 넷째, 이곳은 새로운 종교이념이 순조롭게 일어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이곳은 선사시대 이래로 다양한 종교가 서로 공존하며 이어온 역사적 제의장소로서의 전통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신라 왕실이 천전리에 와서 간절하게 소망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천전리 서석에서 연대를 알 수 있는 초기의 명문은 법흥왕이 즉위하기 1년 전부터의 기록이다. 법흥왕은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의 통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율령을 반포하고 왕권을 강화하며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공인시킨 왕이다. 당시 신라는 삼국 중 국력이 가장 열세였으며 각 지방은 종교적으로 지연공동체(地緣共同體)로 나누어진 제의를 거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라사회를 국가공동체 이념으로 국력을 결집시켜야 하는 절실한 문제를 당시의 신라 왕실은 안고 있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기존의 전통종교는 무교(巫敎)로서 여성 사제인 무(巫)가 돌아가신 조상신을 밤에 희생물을 바치는 제의를 통해 섬기고 있었다. 이에 비해 불교는 남성 사제인 승려가 인도의 왕족 출신인 석가모니를 새벽에 살생하지 않은 깨끗한 제물을 올리며 예불을 드리는 것으로 서로 제의 형식이 달랐다.

서석의 내용을 연대순으로 살펴보면 먼저 계사명(513)은 법흥왕 즉위 1년 전의 것으로서 그는 불교이념을 가지고 즉위 전부터 천전리를 주목하면서 이곳에서 여성이 참여하는 제의를 거행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을사명(525)은 법흥왕 12년 6월 18일 새벽에 사부지갈문왕이 와서 ‘서석곡(書石谷)’이라 명명을 하고, ‘다살’의 제의를 거행하였음을 새긴 내용이다. 이는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갈문왕이 새벽의 예불시간에 부인들과 함께 희생물을 바치는 제의를 거행한 것으로서 이는 불교와 전통종교가 융화된 제의형태였다.

입종갈문왕이 이곳을 다녀간 3년 후에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였으며(528년, 법흥왕 15년), 4년 후에는 살생을 금지하는 등 불교정책에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 갑인명(534년, 법흥왕 21년)은 신라의 첫 불교 사찰인 흥륜사를 크게 일으키기 1년 전의 것이었다. 대왕사(大王寺)에 있는 안장법사(安藏法師)가 다녀갔음을 새겨놓은 것인데, 이는 처음으로 천전리의 바위에 사찰의 이름과 불교승려의 이름을 새긴 것이다. 이때에는 대왕사 주지인 안장법사가 이곳에서 불교식 제의를 거행하였으며 이는 불교공인 이후 법흥왕의 불교이념이 실행되었음을 보여준다.  

▲ 강영경 숙명여자대학교 문학박사

을묘명(535년)은 흥륜사를 크게 일으킨 그 연도의 것이다. ‘법흥대왕 때에 비구승과 사미승 그리고 거지벌촌 중사(居知伐村 衆士, 거지벌촌은 지금 언양의 옛 지명이다)들이 함께 왔다’는 내용인데 이는 법흥왕이 이 지역인들과의 연대 속에서 불교의 대중화(大衆化)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미명(539년)은 진흥왕이 즉위하기 1년 전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과 법흥왕비인 보도부인(保刀夫人), 그리고 어린 진흥왕이 함께 와서 입종갈문왕을 그리워하며 제의를 거행하였다는 내용이다. 이는 입종갈문왕이 이전에 이룩해 놓은 업적을 기리면서, 진흥왕도 법흥왕의 불교정책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 때 거행한 제의는 부인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아 전통종교에 기반을 두면서도 ‘다살’은 하지 않는 불교식 제의를 조화시킨 형태였다. 계해명(543년, 진흥왕 4년)은 13번째 관등인 소사(小舍)의 부인이 행차한 내용이다. 이는 진흥왕 초기에 신라왕실의 불교정책이 전통종교와 조화하며 낮은 신분과 여성을 지향하는 불교대중화정책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을축명(545년, 진흥왕 6년)은 흥륜사를 낙성한 1년 후에 진골 여성이 낮은 신분의 남성과 함께 대규모의 위세를 갖추고 왔다는 내용이다. 신라의 첫 불교사찰인 흥륜사의 낙성을 경축하는 의미있는 행차였지만 사찰이나 승려명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분의 고하와 남녀의 성별에 관계없이 참여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신라 왕실이 불교의 대중화와 함께 토착화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천전리는 법흥왕과 진흥왕대의 절실한 당면과제인 국력 결집을 위한 새로운 종교이념을 이 지역 주민과의 연대를 통해 실현시켜나간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천전리는 역사적인 한국 종교문화의 기록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강영경 숙명여자대학교 문학박사(반구대포럼·울산대공공정책硏 재능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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