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천전리 ‘서석’에 새겨진 ‘그림 新羅史記(신라사기)’

▲ ‘신라건국시조전승신화’를 주제로 새긴 그림. 위의 말 관련 그림은 ‘혁거세난생신화(赫居世卵生神話)’로, 아래의 용 관련 그림은 왕비 ‘알령탄생신화(閼英誕生神話)’로 추정된다.

천전리 ‘서석’ 암각화 중의 ‘선각그림’은 서석 그림 중 가장 늦은 시기의 그림이다. 선대의 동물그림과 도형그림을 피해 암면의 하단부에 배치돼 있는데 주 암면을 기준으로 모두 167개체가 파악되어졌다. 그림의 구성과 내용은 ‘동물’과 ‘자연물’, ‘건조물’들을 모티프로 ‘화랑(花郞)’ ‘행유(行遊)’ ‘포구(浦口)’ ‘기예(技藝)’ ‘신앙(信仰)’ ‘신화(神話)’ 등의 다양한 주제로 전개되어 있다.

이 그림들은 같이 새겨진 명문과 함께 사료가 미약한 초기의 신라문화를 조명할 매우 소중한 기록유물이다. 이 모두를 대중에게 상세히 알림으로써 민족문화를 바르게 전승토록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지면제약 상 그중 역사기록과 관련해 주목되는 중요 그림 두 예를 소개하려 한다.

 

▲ 말 앞의 용기 속에 들어있는 아이그림 도판

바위면 하단부에 배치된 선각그림
서석 그림 중 가장 늦은 시기 조각
동물·자연물·건축물 등 모티프로
화랑·신화 등 다양한 주제 표현해
박혁거세·알령왕비 탄생신화 묘사
감은사와 얽힌 문무대왕의 신화도

◇신라건국시조전승(新羅建國始祖傳承) 그림

신라건국시조전승 그림은 선각그림의 중앙부에서 약간 우측으로 치우친 지점에 잘 알려진 명문 ‘원명(原銘)’과 ‘추명(追銘)’에 접해 있다. 종래 ‘천마도’ 또는 ‘주마도’로 이르며 단순 필마그림으로 보았던 것인데 새로운 실사조사를 통해 매우 주목할만한 요소의 그림들이 확인되었다.
 

▲ 서석에 새겨진 원판 확대본. 커다란 타원 도형이 덧새겨져 훼손이 심하다.

이들의 구체형상을 보면 말 주위를 둘러싼 후광 모양의 ‘방사선(放射線)’, 용솟음치는 말 바로 앞에 바구니일지 알 수 없는 용기 속에 작은 ‘아이(童子)’ 하나가 있다.(이 그림위에 커다란 타원 도형이 굵고 깊게 덧새겨져 아이그림이 심히 훼손). 그림 구성의 전체 형국을 조망하면 서기(瑞氣·상서로운 기운)에 에워싸인 말이 크게 울부짖으며 자리를 박차고 하늘로 솟구치고 있으며, 그 앞에 동자가 서있는 듯한 모습이다.

또한 이 그림과 관심 깊게 연관지어 볼 그림들이 있다. 이 그림의 왼쪽 아랫부분에 땅을 기는듯한 용 한 마리와 그 왼쪽 아래에 승천하듯 용트림 치며 솟아오르는 용 한 마리가 있으며, 이 두 용 사이에 마치 알속에 들어있는 듯한 사람(여자?) 하나가 있다. 만일 이들을 하나의 장르로 제작된 그림으로 상정해 본다면 매우 놀랍고 흥미롭다. 신중을 요하지만 이 시각으로 보면 위의 말 관련 그림은 ‘혁거세난생신화(赫居世卵生神話)’로, 아래의 용 관련 그림은 왕비 ‘알령탄생신화(閼英誕生神話)’로 보인다. 이 관점에서 그림 전체를 관조하면 그림을 에워싼 숲 그림은 나정(蘿井)과 알령정(閼英井) 일대의 숲으로 상정되어진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 숲 사이에 말이 꿇어앉아 울므로 즉시 가서 보니 갑자기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이 있었다. 이것을 쪼개니 그 속에서 어린아이가 나옴으로 이를 거두어 길렀다. 그의 나이가 10여세 되매 뛰어나게 성숙하여 6부 사람들은 그의 출생이 신기하고 이상하므로 떠받들어 높이더니 이때에 이르러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았다. 진한 사람들은 호(瓠)를 박(朴)이라 하는데 처음의 큰알이 박과 같았으므로 그의 성을 박이라 하였다. 거서간은 진한 말로 임금이다.

▲ 감은사 3층석탑과 석탑을 휘감고 있는 용. 죽은 뒤 용이 되어 감은사에 드나들었다는 문무왕 신화를 연상케 한다.

5년 본 정월에 용이 알영정에 나타나 오른편 옆구리로 여자 아이를 낳았다. 한 노파가 보고 이상히 여겨 거두어 기르고 우물이름으로 이름을 지었다. 자라서 얼굴이 덕스러우므로 시조가 듣고 데려다 왕비로 삼았다.…(<삼국사기>권1 혁거세거서간조).

전한지절(前漢地節) 원년(기원전 69년) 임자 3월 초하루에 6부의 조상들은 각각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閼川)의 언덕 위에 모여 논의하였다. “우리들은 위로 백성을 다스릴 임금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여 제 마음대로 하게 되었다. 어찌 덕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를 삼고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겠소!” 이에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밑 나정 곁에 이상환 기운이 전광처럼 땅이 비치는데, 흰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곳을 찾아가 살펴보니 보랏빛 알 한 개가 있는데, 말은 사람을 보자 길게 울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을 시켰다.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지므로 그 일로 인해 그를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 이름하였다.

이날 사양리 알영정 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그 모습과 얼굴은 유달리 고왔으나 입술이 닭부리와 같았다. 월성 북천에 가서 목욕을 시키니 부리가 떨어졌다. 인하여 그 내를 발천이라 하였다. 남산의 서록에 궁실을 짓고 두 성아(聖兒)를 봉양했다. 남자아이는 알에서 나왔고 그 알의 모양이 포(匏)와 같았는데 향인들은 박을 박(朴)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성을 박이라고 했다. 또 여자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 이름으로 이름을 삼았다. 두 성인(聖人)은 13세가 되자 오봉 원년 갑자에 남자는 왕이 되었고 그 여자로 왕후를 삼았다.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다. (<삼국유사> 권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감은사 문무왕신화(感恩寺 文武王神話)

그림

암면의 오른쪽 끝 가까이 아랫부분에 명문 문왕랑(文王郞)과 함께 3층석탑이 새겨져 있고 이 탑의 기단부를 용 한 마리가 감돌고 있다. 이러한 그림구도의 정황은 문무왕이 죽어 동해의 용왕이 되어 대종천을 통해 감은사에 드나들었다는 ‘문무왕 신화’를 연상케 한다. 이때 석탑은 감은사 금당 뜰 석탑(3층석탑)이며, ‘문왕랑’은 문무왕의 동생인 ‘각간 문왕(文王’, <삼국유사> 권2 기이제1 태종춘추공조)으로 비정된다. 이렇게 보면 이 그림은 문왕이 ‘郞’으로 불리고 있는 점으로 보아 아직도 문무왕의 죽음이 애절했던 젊은 시절(감은사 창건 이후 신문왕 재위연간) 문왕이 이곳을 찾아 형 문무왕을 기려 새긴 것임을 의심할 바 없다.

또한 기록과 같이 감포 앞바다에 문무왕의 해저왕릉인 대왕암이, 또 그 가까운 해안에 이견대가 실존하며 그리고 감은사 탑 바로 뒤에 세워졌던 금당의 섬돌 아래 물을 채웠다는 공간과 출입구가 확인된다.

제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정명(政明)이며, 성은 김씨다. 개요(開耀) 원년 신사(681년) 7월 7일에 왕위에 올랐다. 부왕인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가에 감은사를 세웠다. ‘절에 있는 기록에 이런 말이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으로 짓다가 다 끝마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개요 2년(682년)에 끝마쳤다. 금당 섬돌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 두었는데 이는 용이 들어와서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을 대왕암이라고 하고 절은 감은사라고 이름 하였으며, 뒤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은 이견대라고 하였다’(<삼국유사> 권2 만파식적조).
 

▲ 장명수 서경문화재연구원장(문학박사)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이 그림들은 구성과 내용 전개가 사서의 기록과 일치한다. 따라서 이들은 고려시대에 편찬된 문헌기록보다 앞선 당대의 실증적 사료라는 점에서 문화유산적 가치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국보 중의 국보라 평가해 마땅하다.

장명수 서경문화재연구원장(문학박사)

(반구대포럼·울산대공공정책硏 재능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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