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주민이주사업 (하)

▲ 1962년 고사리마을 일대 대현초등학교 철거작업. 서진길 울산예총 고문 제공

울산 각지에서 공단 조성과 공해로 마을이 철거되면서 주민과 주택만 옮겨간 것은 아니었다. 마을에 있던 가게와 이발소, 약국, 의원, 양조장과 동사무소, 교회, 사찰도 모두 옮겨가거나 문을 닫았다. 마을 입향조를 모시던 제당도 천도제로 이별을 고했고, 주민들의 생활을 지탱해 주던 우물이며 방앗간, 상여집, 공동묘지는 버려졌다. 바닷가의 어장과 어선은 물론 어업창고와 고기 잡던 배도 새 거주지로 가지고 갈 수는 없었다. 이런 시설이 있던 큰 마을은 남구의 부곡동 재건마을, 여천동 조합, 매암동 대일, 성암동 선수, 용연동과 울주군 온산읍의 목도마을, 당월마을 등이었다. 이런 큰 마을에는 학교도 있었다.

강제철거로 주민·주택뿐만 아니라
이발소·병원·양조장·사찰 등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거나 문 닫아
특히 공단지역 소재 학교들 대부분
진동하는 폭음·불쾌한 악취 등으로
수업중 구토·질식…결국 폐교 수순

정유공장 건설로 가장 먼저 철거된 고사동에는 대현초등학교와 대현중학교가 있었다. 대현초등학교는 1925년에 개교했고, 대현중학교는 1951년에 개교한 사립 학교였다. 대현중학교는 1963년에 선암동 모살미 아래에 임시로 세웠던 천막학교를 거쳐 부곡동 재건마을에 교사를 신축해서 옮겼다. 필자는 1971년에 중학교 평준화 추첨 1기로 부곡동 대현중학교에 입학해서 3년을 다녔다. 모교 대현중학교는 공해주민 이주사업으로 1989년 2월에 폐교되었다. 사립 대현중학교가 폐교된 이듬해인 1990년 3월에 남구 달동에는 공립 대현중학교가 개교했는데, 1999년이 되자 폐교된 사립과 신설된 공립 대현중학교의 합병이 결정되어 다행히도 지금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중학시절 기억이라면 개교기념일 날 학교에서 용연시장 통까지 달리던 마라톤대회와 버스 통학이다. 성남동에 있던 차부로 나가서 20분 간격으로 나가는 용잠행 시내버스를 타고 통학했는데, 가끔 토요일이면 차비 20원을 아끼려고 8㎞거리를 걸어다닌 적도 있었다. 공해와 관련된 기억은 버스가 변전소를 지날 때 나던 악취로 숨을 쉬기 어려워 매번 수 십초 간 숨을 참곤 했던 일이다. 필자가 경험한 바로 이 악취공해 때문에 울산공단 조성 불과 10년이 안 되어서 공단지역 소재 학교 대탈출이 이어졌다.

남구 대현초등학교는 공해로 두 번이나 이주하면서도 살아남은 학교다. 1968년 9월 4일자 경향신문은 ‘수업 중에 쓰러지기도-울산공업센터 이웃 학교 꼬마’라는 기사에서 “한국석유, 내연발전, 동양합섬, 울산정유공장들과 불과 100미터 이내에 있는 대현국민학교는 42학급 2766명의 아동들이 수업하고 있는데 3일에는 학교 측으로 향해 부는 바람 때문에 1백여 명의 아동들이 수업 중 두통, 눈물, 구토 등을 일으켰다. (중략) 신학기에 16명이 공해가 두려워 타 학교로 전학했고, 1학기에는 169명의 아동들이 다른 학교로 옮겨갔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 무렵 중구 교동 양사초등학교에 다니던 필자의 학급에 여천초등학교에서 전학 온 친구가 실제로 있었다.

결국 울산시교육청에서는 1970년 6월 30일에 학교 주변 10개 기업체에 보상금을 요구하는 한편 대현초등학교를 현재의 위치인 대현동 세관(당시는 울산특별건설국) 부근으로 옮기는 결정을 했다. 그런데 1973년 3월에 막상 학교를 옮기고 나자 통학거리가 멀어지고 이전한 학교 주변에는 공동묘지와 화장장까지 있자 학생 절반만 이전하게 되면서 학교는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대현초등학교가 울산정유공장이 들어설 때 그곳의 교사를 헐고 옮겼는데 10년도 못돼 다시 교사를 옮기는 등의 무계획성을 드러낸 데 대해 학부형들이 불만을 터뜨렸던 것이다. 마침내 대현초등학교는 1974년 3월 6일에 대현동 현 위치에서 본교로 재개교하고, 원래의 선암동 학교 자리에는 선암초등학교가 새로 개교했다. 공해로 촉발된 학교 이전이었지만 이주를 원하는 주민만 떠난 결과가 되었다. 공해문제는 있었지만 공단 한가운데 위치한 대현국민학교는 계속 늘어나는 인구로 인해 1968년에는 여천초등학교가 분리되고, 이어서 수암, 남부, 야음, 동백 초등학교 등이 차례로 분리되어 개교했기 때문에 가장 많은 학교로 분리된 기록도 가지고 있다.

공단 건설이 아닌 공해문제로 가장 먼저 문을 닫은 학교는 용잠초등학교였다. 용잠초등학교는 1939년 4월에 이종만씨의 기부로 세워졌지만 1977년에 폐교되었는데 1975년 당시 11학급에 469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용잠초등학교 폐교는 학교 앞에서 1967년 8월부터 가동에 들어간 울산화력발전소가 원인이었다. 무려 10년을 공해에 시달린 끝에 주민들이 집단이주하면서 학교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울산에는 공해로 인해 자취를 감춘 슬픈 역사를 가진 학교가 더 있다. 온산읍 방도리에 있던 춘도초등학교는 1991년 2월 20일에 41회 졸업생 28명 배출을 끝으로 폐교되고 남아 있던 재학생 4명은 다른 학교로 떠났다. 폐교되기까지 모두 324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지만 학교가 에스오일과 대한유화 부지로 흡수되면서 11개의 목조교실도 허물어졌다. 졸업식 당일에는 전기도 끊어져 있어서 졸업식도 육성으로 진행되었다. 이 학교 제20대 교장으로 부임해서 최종정리를 맡았던 전경식 교장은 “평화롭게 살던 곳 춘도에 쌍용공장의 높은 굴뚝, 진동하는 폭음에 떠밀려 폐교의 슬픔을 맞게 됐다. 동백의 싹으로 배출된 여러분과 만발한 동백꽃으로 다시 만나자”고 폐교와 이별의 아픔을 달랬다고 하며, 총동창회장 최길수씨(1회 졸업생)는 “산업화의 거대한 힘에 밀려 정든 모교를 잃는 아픔을 비길데 없다. 이주주민이 울산시내로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모교 명을 딴 새 학교를 설립하지 못해 더욱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는 신문기사의 제목은 ‘공해가 학교마저 삼켰다’이다.(경향신문 1991년 2월 21일자)
 

▲ 한삼건 울산대 디자인·건축융합대학장

학교와 관련된 공해문제는 용연초등학교도 심각했다. ‘국교생 2백여 명 독가스 중독, 울산 용연국교 두통, 피부병…교사 1명 질식’이라는 제목의 1991년 5월 5일자 경향신문 사회면 6단 기사가 주목을 끈다. 교사가 수업 중에 구토를 한 뒤에 쓰러져서 병원으로 실려가고, 학생들은 얼굴 피부가 벗겨지고 저학년 학생과 신임 여교사는 얼굴에 수포와 버짐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끔찍한 내용이었다. 1962년 3월 5일에 용잠초등학교 용연분교장으로 개교해서 31회 3158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던 이 학교는 1998년 2월에 결국 폐교되었다. 그런데 용연초등학교는 졸업생들의 끈질긴 노력이 결실을 맺어서 폐교 후 만 6년 만인 2004년 3월에 27학급 규모로 남구 대현동 옛 영남화학 사택자리에서 복교되었다. 이외에도 공단 조성과 공해로 인해 폐교된 학교는 당월초등학교(1992), 온산초등학교(1993), 용암초등학교(1997)가 있다. 이전한 학교는 온산중학교로 1977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편, 공업용수와 식수댐 건설로 사라진 학교도 있다. 사연댐 건설로 1966년에 한번 이전했던 반곡초등학교 대곡분교는 1984년에 완전 폐교되었고, 회야댐에 수몰된 청량초등학교 신리분교는 1996년에 문을 닫았다.

울산공업센터 조성 당시만 해도 우리 정부나 기업은 모두 공해에 무지했다. 공장 코앞에 외국인 사택과 회장 별장을 지었던 그들이었으니 할 말이 없지만, 고향과 모교를 잃어버린 주민들의 아픔은 너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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