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대곡천은 자연사·선사유적·유불문화 적층지대

▲ 반구대와 집청정. 중앙 상단이 반구산, 가운데 석대가 반구대, 하단 개울이 대곡천, 왼쪽 건물이 반고서원유허비각, 오른쪽이 집청정이다.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이 소재한 대곡천(반구천, 반계) 골짜기는 수려한 산수로 말미암아 신라시대의 화랑 수련장으로 활용되었던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이다. 그 중에서 거북 형상의 산 끝자락 석대를 반구대라고 부른다. 사실 이곳에는 이런 명칭이 붙기 전부터 ‘엎드린 거북(盤龜)’이라는 명칭의 유래가 된 반구산(연고산)이 있었고 그 모양새도 엎드린 거북 형상이었다. 반구대는 고려 말 언양에 유배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이 중구일에 올라 느낀 울적한 심사를 한시로 표현한 이래 경주·울산·언양 사람뿐 아니라 전국 사대부들 간에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7000년 전 선사시대 사람이 남긴 각석과 암각화의 소재지로 알려져 있지만 이 골짜기에는 선사인의 기원과 소망을 담은 기호학적 문양과 각종 그림 외에도 역사시대의 다기다양한 인물의 삶과 예술의 자취가 공존하는 ‘문화의 적층지대’라고 할 만하다.

▲ 최남복의 백련구곡도(원명 백련서사산수도, 소장처 미상).

후세에 전달할 표현방법을 갖추지 못한 시대의 주인공인 동물들은 몸으로 삶의 흔적을 도처에 남겨 놓았다. 지금도 목도하는 가장 오랜 기록은 이곳을 활보하던 공룡 발자국 화석이다. 대곡천 유역에 산재한 이 흔적은 약 1억 년 전 전기 백악기에 살았던 대형 및 중형 초식공룡의 발자국이라고 한다. 천전리각석 앞 바위와 대곡리 계곡 옆 바위 및 암각화 하부에도 흩어져 있어서 이 일대가 중대형 초식공룡의 집단서식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류의 출현 이후 청동기시대 인간의 생활상과 기원을 담아 바위 면에 새겨놓은 다양한 문양과 그림은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천전리각석의 동심원을 비롯한 기하학적 문양과 동물, 반구대암각화에 나타나는 각종 동물군상과 인간 얼굴형상, 사냥의 모습 등은 그 시대를 산 사람의 소망과 희원의 표현이었다.

1억년 전에 뛰놀던 공룡 흔적부터
선사인 생활상 골짜기에 남아있어
신라 화랑들의 심신수련 현장이자
불교·유학 관련된 유산 집적된 곳
개발논리에 밀려 원형상실 아쉬워

천전리각석에 새겨진 20여 명의 화랑 이름은 이곳이 심신수련의 현장이었음을 알려주고, 원명(原銘)과 추명(追銘)으로 일컬어지는 두 명문에는 사부지갈문왕과 어사추여랑이 다녀간 사실과 그 뒤에 다시 찾아와 과거를 추억한 사연이 담겨 있다. 우리는 원명을 통해 무명의 옛 골짜기(古谷)를 서석곡(書石谷)이라는 새 이름으로 부른 사실과, 이곳을 다녀간 화랑과 귀족은 자기의 이름과 독특한 사연을 남겨놓은 기록의 장소임을 알 수 있다. 그 뒤 오랜 세월이 지나 서석곡이라는 이름은 잊힘으로써 이제는 평범한 큰 골짜기(한실, 大谷)라는 명칭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화랑의 심신수련장이요 소망과 희원을 빌던 기원의 장소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다시금 그 의미를 반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골짜기는 또 신라시대 이래 많은 불교 사찰이 존재하던 속세와 유래된 공간이었다. 고승 원효가 거주하면서 문수산 영취사에 주석하던 낭지의 명으로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하였다고 하는 반고사(磻高寺), 신라시대에 건립되어 조선후기까지 존속하였다고 하는 장천사, 조선후기에 백련서사의 건립 터전이 된 백련사 등이 존속하였던 사실이 확인된다.

더욱이 선비의 정자 건립이 일반화된 18세기에는 이 계곡에 최신기(1673~1737)의 집청정, 김경(1683~1747)의 관서정, 최남복(1759~1814)의 백련정사(백련정, 수옥정)가 건립되어 심성수양의 터전과 교유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20세기에도 이 골짜기에는 송천정, 모은정, 수경정 등이 건립되어 선비문화의 전통을 이어가는 곳이라는 명성을 유지하였다. 이 정자들의 건립은 대체로 선비의 장수(藏修) 의지를 표방하고 있지만 반구대 인근의 집청정과 모은정은 고려 말 언양에 유배되었던 포은 선생을 사모하는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반구대의 이명이 포은대라는 점을 고려할 때 포은에 대한 이 지역 선비들의 사모와 존경심은 특별하다 하겠다. 언양의 선비들은 1712년에 반구대 남쪽 산자락에 반고서원을 세워 포은과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 세 분을 배향하였으나 1871년에 대원군의 철폐령으로 건물이 훼철되고 말았다. 그 후 유림에서는 1885년에 포은대영모비, 1890년에 포은대실록비와 반고서원유허비를 세웠고 1965년에는 반구대 북쪽 언덕으로 장소를 옮겨 반구서원을 재건해 놓았다.

선비문화의 전개에서 또 주목해야 할 것은 울산에서도 산수자연의 취락을 구가한 구곡원림의 경영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다시피 구곡원림은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 1130~1200)의 무이구곡에까지 소급된다. 16세기 퇴계 이황의 도산구곡, 율곡 이이의 석담구곡 이래로 구곡의 경영은 전국에 전파되어 한강 정구의 무흘구곡, 우암 송시열의 화양구곡, 곡운 김수증의 곡운구곡 등의 구곡원림이 널리 알려진 바 있었다. 따라서 전국의 빼어난 산수 계곡에는 구곡원림이 조성되는 것이 일반적 추세였다. 백련서사를 지어 후학을 양성하면서 심신수양과 후생 교육에 뜻을 기울인 최남복은 앞의 계곡을 백련구곡이라 명명하고 그곳을 무이구곡에 비겨 ‘무이구곡도가’를 효방한 10수의 ‘백련구곡도가(白蓮九曲櫂歌)’를 지어 뱃놀이를 즐겼을 뿐 아니라 직접 ‘백련구곡도’를 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백련서사가 있던 대곡천 상류지역은 대곡댐 속에 잠기고 말았다. 또 19세기 말에 언양 선비 송찬규(1838~1910)도 이 계곡의 아홉 굽이를 읊은 ‘반계구곡음(磻溪九曲吟)을 남긴 바 있다. 그러나 이 계곡은 울산시민의 용수 확보를 위해 사연댐과 대곡댐이 축조됨에 따라 구곡의 일부가 저수지 속에 묻히고 말았다.

이처럼 대곡천 유역에는 지질시대에 살던 공룡의 발자국 화석이 곳곳에 흩어져 있고, 7000년 전 선사인의 생활방식과 소망을 담은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 그리고 불교 및 유학과 관련된 문화유적이 집적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문화유산이 산업화에 밀리고, 경제성장을 위한 개발논리에 밀려서 원형을 상실하고 있다. 수자원 확보를 위해 1965년에 축조한 사연댐과 2005년에 완성한 대곡댐으로 인한 문화재 훼손과 멸실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댐 상류에서 물막이 공사를 진행 중인 반구대암각화뿐 아니라, 댐을 쌓으면서 물 흐름을 막아 하천과 격리된 상태가 된 관서정은 ‘흘러가는 물줄기를 바라본다’는 관서(觀逝)의 의미를 잃고 울산과학기술대학교(UNIST) 후문의 대숲에 고립되어 있고, 대곡댐 수몰지구의 백련정은 현재 계곡과 동떨어진 봉계리의 산등성이에 옮겨져 있으면서 본 이름에 걸맞은 자리를 되찾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 성범중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그뿐만이 아니다. 대곡댐 수몰지구에서 발굴된 고대 토기·기와가마에서부터 조선시대 기와·분청사기·백자·옹기·숯가마와 제련로, 삼정리 하삼정마을의 2~7세기 고분 약 1000기에서 출토된 유물 등을 대곡박물관에 상설 전시하고 있으나 그 본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처럼 오랜 시간에 걸친 적층문화의 원형이 개발논리에 의해 사라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자연과 문화유산은 한번 훼멸하면 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리기가 난망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대곡천 유역에서 어떤 문화가 생성되고 전개되어 후세에 남겨주게 될는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성범중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반구대포럼·울산대공공정책硏 재능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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