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떠나 오랜 세월 객지 살다 보니
가끔씩 듣는 고향 소식 더없이 반가워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기대도

▲ 김영조 위동해운 여객팀장 재경울산향우회 운영위원

학창시절 연세가 지긋하신 한문 선생님의 수업은 언제나 점심시간이 막 끝난 오후 수업이 시작되는 첫 시간이었다. 유난히 다림질이 잘된 빳빳한 와이셔츠와 짙은 향수냄새를 풍기시며 식사와 함께 반주를 한잔 하신 불그레한 얼굴임에도 일필휘지로 칠판 가득히 한시를 써 내려 가셨다. 우리는 흰 글자와 녹색의 칠판이 뒤섞여 연두빛으로 의식이 몽롱해져 가는데도 선생님은 시종일관 컬컬한 음성으로 운을 짚어가며 의미를 설명하곤 했다. 그때는 자장가로만 들렸던 시 한편의 의미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가을바람에 오직 괴로이 읊조리나니/ 세상에 날 알아주는 이 드물구나/ 창밖엔 밤 깊도록 비가 내리는데/ 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을 내닫네.’

통일 신라 말 원대한 꿈을 품고 당나라에 간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그도 타국에서 17년 동안 생활하면서 느끼는 외로움과 향수라는 인간적 고뇌를 추야우중(秋夜雨中)이라는 한편의 시로 고스란히 녹여서 표현한 듯하다.

문득 돌아보니 나도 십대에 고향을 떠나 최치원보다 더 오랜 시간을 타향에서 보내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외국에 나가면 모두가 애국자가 되고 타향에서는 고향 까치만 봐도 반갑다는 말처럼 가끔 매스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고향 소식은 만선의 기쁨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를 들은 듯, 한없는 전율로 요동친다. 얼마 전 장생포와 염포를 잇는 울산대교가 개통됐다는 소식은 타향살이에 이골이 난 내게 아련한 추억의 시계태엽을 되돌리게 할 만큼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내가 태어나고 청소년기를 보낸 염포(鹽浦)는 부산포 내이포와 더불어 3포를 이루어 일본에 개방한 국제무역항으로 역사적으로 가치가 적지 않은 곳이다.

마을 앞에는 푸른 바다와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서 여름이면 수영장이 되어 주었고 선산이 있는 염포산은 야생의 먹거리와 함께 자연친화적 놀이터가 되어주었다. 고래고기를 삶아 종팔던 가게들과 어디서나 들리던 ‘맬치젖 사소’의 외침과 지천으로 널린 생선들을 이제는 찾아 볼 수 없다. 싼 가격으로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던 고래고기는 도회지 고급 전문점에서나 맛 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 된 지 오래다. 상전벽해라더니 푸른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아름답고 거대한 현수교가 생긴 걸 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가끔씩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어디가 어떻게 또 변해 있을까 수수께끼를 풀 듯 궁금하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한 해법찾기에 여념이 없다. 고향은 마치 우연히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묘약이기도 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도 바다가 있고 섬과 산이 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났고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고향의 냄새와는 사뭇 다른 듯하다.

여우도 생을 마감 할 때는 자신이 태어난 구릉을 향해 머리를 둔다고 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하지 않는가. 초심이란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맹세일 것이다. 고향을 떠나 오랜 세월을 객지에서 지내왔는데 나는 초심을 지키며 살아 왔을까 반추해 본다. 앞으로 고향은 또 어떤 모습으로 풍요롭고 행복한 삶의 공간으로 변화해 갈까, 흥분과 기대가 자못 다대하다.

김영조 위동해운 여객팀장 재경울산향우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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