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선사의 길에서 21세기를 묻다

▲ 반구대 암각화 모습. 경상일보 자료사진

내 문학과 그림 작업실이 천전리 각석 가까이에 있다 보니 가끔은 옛 선비들이 머물었던 길을 따라 산책을 하게 된다.

대곡천을 따라 가다보면 백악기에 살았던 공룡, 뚜벅뚜벅 지축을 울렸던 그 덩치 큰 발자국 흔적들은 지구의 종말과 함께 천지개벽이란 새 이정표를 말해 주었기에 한편으로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연화산 끝자락과 마주보는 국보 제147호 천전리 각석. 샤머니즘의 반구대암각화와는 달리 기하학적 문양으로 치장된 청동기를 거쳐 신라왕족들을 불러들이게 한 각석 옆에는 삼국통일의 주역인 화랑들의 군사 연병장이 있다. 이곳에는 아직 원시가 그대로 살아있어 풀벌레는 동심원을 우주로 전송하기에 바쁘다.

반구대암각화 신비를 벗기기 위해선 먼저 저 먼먼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포경역사를 화가가 본 견해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우리민족 기원 알려주는 중요자료
각종 동물모양·동심원·돛단배 등
자연을 사랑하며 사는 존재의 방식
바위에 새긴 수준 높은 예술 통해
문명의 독 씻고 자연과 교감 나눠

인간과 유사하게 생태를 가진 고래, 그들의 조상은 포유류 동물로서 어쩌면 맹수들에게 쫓기다 살아남기 위해 바다로 삶의 근거지를 옮겼을 것이다. 큰 몸통과 커다란 입을 가지고 바다 속 어족을 먹이사슬로 살았던 다종의 그들은 바다 깊숙한 곳에서 인간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외롭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약육강식 수난의 역사는 암각화라는 전대미문의 문화유산을 안겨준 결과를 가져왔다. 국보 제285호로 지정된 반구대암각화에서 알 수 있듯이 고래는 원시시대 훨씬 이전부터 살아온 동물이다. 암각화에는 여러 가지 짐승들과 고래가 조각이 되어 있는데 그 중에 고래의 모습들이 특히 많이 그려져 있다.

선사인들은 돌창으로 고래를 포획하고 돌칼로 살점을 떼내어 식량으로 사용하며, 물가로 나온 고래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 놓았을 만큼 고래는 그 시대 인간의 주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미술사 개론서에는 원시예술과 선사예술을 묶어서 서술하기도 하지만, 선사예술의 초기형을 잘 나타나게 해주는 것은 바위에 새긴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고인돌 위에 방향을 알리는 별자리가 한 예로 들 수 있다. 선사예술은 내가 살아있는 것에 대한 기쁨을 느끼는 예술이고, 생명의 기본을 통찰한 동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목숨에서 기쁨을 찾아내는 예술이 아니라, 어떤 다른 종류의 흥미에 의해서 그것들을 변형시키려는 분류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예술인들은 바위에 새긴 예술에 관해서는 그 어떤 중요한 예술 양식이 발생할 가능성은 아직도 초기 단계에 있다고 말한다.

바위그림을 암각화라고 하는데, 암각화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이나 바람을 커다란 바위 등,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것을 말한다. 전 세계적으로 암각화는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천전리 각석의 바위그림에 동심원이 많은 것은,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태양신을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천전리 각석·반구대암각화를 형상화하여 쓴 졸저 제2시집 <돌에 새긴 원시>의 내용에도 있듯이, 우리는 가끔 ‘원시’라는 말의 의미를 쓴다. 아마 일반인들이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넓은 의미를 가진 말일 것이다. ‘원시적’이라는 말은 특정한 장소나 시대, 또는 인류의 특정한 타입 같은 것이 아니라, ‘시대 흐름의 단계’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천전리 너럭바위 연꽃 띄운 너럭바위

돌에 새긴 원시 자취 그 행간(行間) 헤쳐 보면

누 천 년 잠든 세월이 눈 비비고 일어선다

동심원 마름모꼴 기하학 물결무늬

백악기 주인 발자국 뚜벅뚜벅 걸어와서

암각화 요철(凹凸)을 더듬어 혈맥처럼 돋아난다

거북이 산을 넘다 멈춰선 반구자락

범 사슴 뛰어놀다 바위벽에 몸 숨기고

지금도 가만 다가와 세상소리 엿듣는다

-졸시 ‘돌에 새긴 원시’ 전문

이러한 의미에서 ‘원시적’이라는 낱말은 오늘날 세계의 각 지방에 살고 있는 원시적인 종목의 예술뿐만 아니라, 역사 이전시대 원시적 발달단계에 있는 광범위한 인류의 예술까지도 포함된다. 또한 우리 주위에 있는 원시예술 속에 어린 아이 때의 유년기 예술을 관찰해 보면, 울산 대곡리 반구대암각화가 처음 아이들에 의해 발견되었듯이, 아이들은 그 유년기에, 인류의 유년기에 볼 수 있었던 예술발달의 여러 상태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반구대암각화를 조각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 높은 암벽에 밑그림도 없이 곡예에 가까울 정도로 조각을 했을 것이다. 거의 걸작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창조했던 것이다. 거기에서 의식을 행하고 그림 그리는 장소로 사용되었던 곳. 생식과 번식과 주술의식, 죽은 자들의 영혼이 머무는 장소, 신과 만날 수 있는 공간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질 수 있겠지만, 현실세계와 다른 특별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과연 그 시대의 예술가가 회화의 기술을 익힌 학교가 존재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구대암각화 그림은 그 어떤 현대 미술작품에도 뒤지지 않는 기술의 완성도에서 우리를 흥분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감동을 담고 있다. 능숙한 솜씨와 재능, 영감과 독창성, 감수성과 신성함으로 빚어진 창조물 앞에서 현대의 순수미술이 무색해진다.

그 시대 암각화를 새긴 사람들은 어디에서 생활했을까. 움막, 동굴, 어둠과 추위, 습기, 비와 강한 바람, 번개와 천둥소리로 인해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이겨내고, 그 당시 특별한 주제의 그림을 특정한 장소를 선택해서 자유롭게 그렸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수준 높은 문화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국보 제147호 천전리 각석은 우리나라 최초로 발견된 암각화 유적으로 각종 동물모양과 동심원, 나선형, 마름모와 추상적인 문양, 돛을 단 배 등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로 이어주는 종교적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돛을 단 배 그림이 있는 것은 배가 반구대까지 들어왔다는 것이다.

▲ 임석 시인·서양화가·한국문인협회 이사

기하학적 예술이 기술적인 과정 속에서 하나의 상징적 의욕에 의해 결정된 목적을 지닌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경제적 욕구에 응하기 위해서 또 도구와 기술의 뒤얽힘에서 생겨난 생존의 예술, 하지만 사회의 정신적 욕구에 의해 생산된 상징을 주로 하는 기하학적 예술은 그 형태만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는 상징적 예술보다 훨씬 의미심장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수많은 전쟁과 산업화 속에서도 살아남은 우리 선사의 자취,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울산의 자랑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 각석, 그 삶의 밑바닥에서 품어내는 싱싱한 생명력, 자연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존재의 방식은 문명의 독을 씻고, 자연과 교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임석 시인·서양화가·한국문인협회 이사

(반구대포럼·울산대공공정책硏 재능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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