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씨말린 귀신고래, 다시 동해에 둥지 틀 날 올까
반구대암각화에서 고래문화를 생각하며

▲ 장생포 고래해체작업장.

귀신고래·긴수염고래·혹등고래 등 수많은 고래그림 새겨져
우리 선조들의 주식이 고래였음을 시사하는 강력한 증거물
해양문화의 고대사적 시원이라 할만한 소중한 세계인류유

우리 식생활사에서 고래고기 섭취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울산 반구대암각화와 장생포 고래잡이는 수천 년 간극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내재적 연속성이 너무도 극명하다. 고래문화의 장기 지속성이 적어도 울산 땅에서 만큼은 지금껏 입증된다.

반구대에 각인된 고래는 귀신고래, 긴수염고래, 혹등고래 따위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배의 밭고랑 무늬가 돋보이는 참고래, 배 타고 고래를 포획하는 선사인의 어로활동, 아기를 업고 가는 어미고래, 고래고기를 분육(分肉)한 듯한 분배 그림도 엿보인다. 캐나다 밴쿠버의 누트카(Nootka), 알래스카의 에스키모, 쿠릴열도의 아이누, 태평양 알류트(Aleut) 등의 고래잡이와 비교되는 소중한 해양문화 유산이다.

▲ 반구대암각화 탁본.

동해안에 자주 회유해오는 고래는 긴수염고래과(북극고래, 긴수염고래), 참고래과(브라이드고래, 밍크고래, 참고래, 보리고래, 돌고래, 흰긴수염고래), 향고래과(향유고래), 참돌고래과(흰옆돌고래, 돌고래, 참돌고래), 곱시기과(곱시기, 흑곱시기), 귀신고래과(귀신고래) 등이니, 대개 이들 고래가 포함된 것으로 여겨진다. 반구대암각화는 우리 선조들의 주식이 고래였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증거물이다.

수많은 고래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고래는 역시 귀신고래다. 우리나라 연안에는 예부터 귀신고래가 많아 19세기 말 일본 선단에 잡힌 고래의 태반이 귀신고래였다. 세계 고래 학명에서 우리 학명이 붙은 고래는 귀신고래를 뜻하는 ‘Korean Grey Whale’뿐이다. 일부일처제로 금실이 좋아 암놈이 죽으면 수놈이 곁을 지키다가 마침내 같이 잡혀 죽음을 맞는다. 새끼가 먼저 작살을 맞으면 암수 어미가 새끼 곁을 빙빙 돌다가 또한 같이 잡힌다. 동물의 정을 역이용한 인간의 야비한 사냥 방식이다. 1899년 일본의 한 포경선의 항해일지를 보면, 영일만에서 100두의 귀신고래떼를 목격한 기록도 나온다.

귀신고래의 어쩌면 인간보다도 진한 혈육의 정을 보면서 귀신고래를 멸종시킨 인간의 잔혹함에 미안한 마음을 버릴 수 없다. 캄차카 반도의 차가운 바다에서 귀신고래들이 유영하는 모습이 간혹 관찰되고 있으니, 행여 언젠가 우리나라로 돌아올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반도는 ‘고래의 낙원’이었다. 국립수산과학원이 파악하고 있는 한반도 연해의 서식 고래류는 대형 고래류 9종, 소형 고래류 26종, 도합 35종이다. 전 세계 오대양과 강에 80여 종이 분포하는 것에 비하면 한반도 고래 분포의 다양성은 꽤 높은 편이다.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영일만 일대는 예부터 고래바다, 즉 경해(鯨海)로 불렸다.

1849년 무렵 한반도 연안에서 조업한 미국 포경선의 포경 일지에는 “많은 고래들이 보인다. 수많은 혹등고래와 대왕고래, 참고래, 긴수염고래가 사방팔방에서 뛰어논다. 셀 수 조차 없다”고 기록돼 있다. “아주 많은 고래(great number of whales), 많은 고래(plenty of whales), 사면팔방에 고래(you can see whales every direction), 고래가 무수히 보였다(whales in sight without number)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대형고래가 많았던 것 같다.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범고래를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삼는다. 고래는 여느 해양동물과 다르기 때문이다. 고래의 영혼은 인간의 영혼과 맞닿아 신들의 세계를 창조해내곤 한다. 북미 이누이트 족은 고래의 경골 뼈를 마을 입구에 세워 공동체의 안녕을 구가하는 신성영역으로 삼았다. 한국인의 문화에서 이와 유사한 고래풍습이나 의례는 없다. 그러나 반구대암각화 같이 고래떼를 묘사하고 각인시켜둔 사례는 세계사적으로 거의 전례가 없다. 반구대암각화의 고래그림은 세계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것이다. 고래가 각인된 암각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떼를 지어 많은 고래가 한곳에 모여있는 암각화는 없다. 그런 점에서 반구대의 고래그림은 각별성이나 특이성, 군집성 등에서 너무도 소중한 유산이다.

분명히 반구대 사람들은 고래로 생계를 유지하고 축제 및 의례를 행하면서 그 신성행위의 상징들을 돌에 각인시켜 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반구대암각화에는 어느 시점에서인가 멈추어버리기는 했어도 당대 화려무쌍했던 고래잡이 풍습의 어느 절정이 현재의 암각화 군집으로 유전되는 것이리라. 넓고 그 다양성에서 어느 예술기록보다도 오래되었다. 반구대암각화만한 규모와 스케일로 압도하는 해양문화 암각화는 한국의 보배에서 벗어나 세계인류유산으로 인정될만하다.

반구대암각화는 해양문화의 선사고대적 시원이자 모태로 인정된다. 필자가 창립을 주도한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APOCC)의 로고를 반구대의 고래잡이 배에서 가져온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바다로 나아가면서 고래를 잡던 선사인의 기상은 바로 바다를 중시하던 우리의 잃어버린 선사적 시원이 아닐까. 하여 우리는 반구대암각화에서 해양문화의 어떤 전형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반구대암각화는 유네스코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해양생물종 다양성의 살아있는 학교이기도 하다.

웨일 라이더(Whale Rider)란 영화가 있다. 말 그대로 고래를 타고 오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야기는 마오리(Maori)족의 전설로부터 시작된다. 바다를 벗삼아 사는 마오리 족 소녀 파이키아의 이야기. 먼 옛날 인간과 고래가 한 몸처럼 가까웠던 시절, 마오리 족의 시조인 ‘카후테아 테 랑가’가 고래를 타고 왕가라 마을에 도착한다. 그는 마을에 정착했고, 고래는 주인과의 추억을 고이 간직한 채 자신의 근원인 바다로 돌아간다. 세월이 흘러 인간은 점차 고래와 감응하는 능력을 잃어간다. 고래와 인간이 대화하고 마음이 통하던 시절에는 인간과 자연은 둘이 아니었다. 마오리 족의 천년 전설에 따르면 “언젠가 재림할 후계자는 반드시 고래를 타고 오며 남자다”라고 믿었다. 어느날 부족의 수호신인 고래들이 떼지어 해안으로 몰려와 죽기 시작한다. 핵실험으로 인한 방사능오염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야기의 결론은 딸로 태어났기에 멸시를 받던 파이키아가 고래와 인간 간의 대화를 회복시키면서 부족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 바다의 운명을 극복하는 것으로 끝난다. 마오리 족의 천년 전설처럼 우리들 시대의 구세주는 정녕 고래를 타고 나타날 수 있을까.

태평양 팔라우의 고래센터에서의 일이다. 고래들은 사람의 말귀를 알아듣고 제법 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들은 고래와 대화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파이키아 같은 소녀들은 더 이상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 제주대 석좌교수

육지를 마다하고 바다를 택하여 살아온 특이한 포유동물.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이 <모비딕>(Moby Dick)에서 그렸듯 ‘고래 등 같이 큰’ 포유동물과 인간의 교감은 매우 복잡 미묘하여 고래와 인간의 갈등과 투쟁은 쉽게 종식되지 않을 전망이다. ‘귀신고래가 돌아온다면 바다에도 평화가 깃들어 경해(鯨海)라는 옛 명칭이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인즉, 행여 돌아올 수 있을는지’하는 생각이 든다. 반구대암각화의 고래들이 어느날 갑자가 소리를 지르면서 동해로 내달리는 듯한 환청에 잠시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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