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영남알프스
개발과 보존에 대한 찬반양론 뜨거워
올바른 방향으로 변모해 나가길 기원

▲ 김영조 위동해운 여객팀장 재경울산향우회 운영위원

유년 시절 초등학교를 세 곳이나 다녀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 다시 돌아오지 않으나 추억은 남아 절대 떠나가지 않는다는 경구처럼 나는 남들보다 세배의 추억을 가진 사람에 속한다. 1970년대 부모님은 두 동생과 이른바 영남알프스의 맏형격인 신불산 자락에서 배와 밤 농장을 하셨다. 세칭 귀남 집안의 삼대독자 장손으로 태어난 나는 조부님의 손자 사랑과 교육열로 초교를 부모님과 떨어져 울산의 조부모 슬하에서 다닌 것이다.

당시에 조부님께서는 염포에서 가장 큰 멸치 어장을 하셨는데, 1960년대 말까지 신불산 인근 언양에는 현대적 시설을 갖춘 학사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생애에 의미 있는 일로써 언양중학교와 언양농고를 신축해 건물을 지역사회에 희사하셨다. 올해들어 작고하신 조부님을 대신해 재경 언양출신 동문들로부터 감사패까지 받았으니 당신은 내게 족함이 있으면 서슴없이 베풀라는 인생방정식의 숙제를 남겨주신 셈이다. 요즘 국내 굴지 모 기업의 경영권 다툼을 반면교사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참 의미를 조부님의 삶을 통해 되돌아보게 된다.

3학년이 되어서야 부모님 곁으로 돌아갔는데 신불산 아래 삼성 SDI 공장 위쪽 금사마을에서 살았고 도보로 왕복 30리 거리인 방기초교를 5학년까지 다녔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와 왕명에 따라 창건했다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의 하나인 통도사와 중국 당나라 태화사의 승려들이 장마로 인한 산사태로 매몰될 것을 예견하고 효척판구중(曉擲板求衆)이라고 쓴 현판을 날려 보내 그들을 구해준 인연으로 천명의 중국 승려가 신라로 와서 원효의 제자가 되었다는 내원사는 내 소싯적 단골 소풍 장소였다.

격랑의 고려말, 시대사적 순응을 거부하고 하여가에 대항해 단심가로 충심과 절개를 후세에 남기고 선죽교에서 최후를 맞은 충신 정몽주의 유배지로 널리 알려진 작천정은 지금도 빼어난 자연경관과 초입에 하늘에 호소하듯 큰바위 통째로 석각돼 있는 ‘널리 인간을 복되게 한다’는 한민족의 개천이념 ‘인내천’으로 인해 사시사철 관광객들로 흥성되고 있다. 조선시대 왕에게 진상하던 미나리와 한우불고기로 알려진 이곳이 과거 지리산처럼 무장 공비들의 아지트로 인근 지역의 많은 주민이 희생된 아픈 역사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작년 겨울에 고향 갈 기회가 생겨 실로 오랜만에 신불산 산행에 나섰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불현듯 나를 소년시절 불태웠던 대망몽의 회억에 젖게 했다. 주차장에 도착해보니 등억 온천단지 내에는 복합웰컴센터를 만들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고 옛 흔적을 찾기란 각주구검에 다름 아니었다. 내가 너무 늦게 찾아 온 탓이었을까. 대학시절 친구들과 물놀이 와서 밤새워 젊은 날의 고민을 나눴던 간월산장은 헐리고 간판만 간신히 걸고 가건물에서 막걸리와 부침개를 팔고 있었다. 얼마 전 매스컴을 통해 신불산 케이블카 설치에 대한 찬반양론이 뜨겁다는 소식을 접했다.

고향에서 지낸 날보다 떠나 산 지가 더 많은 내가 호불호를 이야기 할 자격은 없지만 문득 고향에서 뿌리내리고 고향을 위해 헌신적으로 사는 한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나이 들면서 느끼는 것은 옳다 그르다는 문제보다 나와 다르지만 화합하며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언필칭 ‘화이부동’에 주목되는 건 나도 노회해 가는 징표인 듯 하다. 양측 모두 영남알프스의 자연과 지역을 아끼는 마음만큼은 한결같을 것이다.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올곧은 모습으로 변모하기를 타향에서 간절히 염원한다.

김영조 위동해운 여객팀장 재경울산향우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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