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6)김병희와 건국준비위원회

▲ 일송 김병희가 1960년대 후반부터 칩거했던 집. 울산시 동구 일산동 해변가에 있어 경치가 빼어났던 이 집은 일송이 광주로 이사를 간 후 식당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펼쳤던 일송(一松) 김병희(金昞熙)도 정치인이 될 수 있는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지만 해방 후 첫발을 디뎠던 건국준비위원회가 좌익단체로 몰리는 바람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다. 해방 후 좌우익 논쟁 속에서 희생됐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일송은 97세로 아직 살아 있다.

일송은 컴퓨터 귀재로 요즘도 매일 컴퓨터를 치면서 <일송 논설집>을 발간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그는 이미 10여권의 <일송 논설집>을 발간했다. 단지 요즘은 귀가 어두워 전화가 오면 손을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면서 상대방과 통화한다.

1918년 울산군 동면 일산진에서 태어났던 일송은 보성과 남목, 심상소학교 등 초등학교를 여러 곳 다녔는데 이것은 대구사범에 진학하기 위해 불가피했다. 어린시절 ‘적호소년단’에서 항일운동을 펼쳤던 그가 항일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성세빈, 성세륭, 김경출, 박학규, 서진문 등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민족주의자들이 일산진에 많이 살았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였던 그는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동기들이 이 땅에서 교사생활에 만족하면서 지낼 때 보다 큰 뜻을 갖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에서는 물리학에 관심 있는 수재들이 모두 모이는 동경물리학교를 거쳐 규슈(九州)제국대학 이학부를 졸업했다.

해방 초 건준 울산지부 교육장 맡아
좌익단체로 몰리면서 파란만장한 삶
1949년 해사 교수생활 문제로 옥살이
6·25때 보도연맹 가입…형무소 수감
동구 근현대 인물들과 직접 만나 교류
97세 컴퓨터 귀재로 일송 논설집 발간

해방이 되자 그는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울산지부 교육장이 되었다. 일송은 이와 관련 “당시는 건준에 참여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건준은 해방 후 혼란스러웠던 치안을 바로잡기 위해 모인 단체로 몽양과 안재홍(安在鴻)이 중심이 되어 만들었다. 그러나 김성수, 송진우 등 우익세력들이 불참하였고 1945년 9월 회의 후 박헌영(朴憲永) 등 공산당계열이 주도하면서 좌익 성향을 보였다. 이 때문에 이 단체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로부터 테러와 고문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6·25가 일어나자 좌익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어야 했다.

일송 외에도 울산에서 건준에 가입해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이 김재문이었다. 일제강점기 울산 최고의 부자 김좌성의 장남으로 일본서 아오야마(靑山)대학을 졸업한 후 국내에서 도평의원까지 지냈다. 김좌성은 일제강점기 3·1회관과 울산농고 건립 때 많은 돈을 희사해 ‘기부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김재문 역시 아버지처럼 해방이 될 때까지 사회사업에 많은 돈을 희사했다. 따라서 해방이 되고 건준이 만들어졌을 때 울산군민들은 그를 건준 울산시지부장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건준이 좌익단체로 몰리면서 서북청년단의 협박에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부산으로 도주까지 해야 했다.

해방 후 일송은 김경출, 박두복, 박학규는 물론이고 서생의 이미동 등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펼쳤던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일송은 “일제강점기 울산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갖고 항일운동을 펼쳤던 인물들이 많았지만 김경출, 박두복 이미동이 철저한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던 인물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일송은 “당시만 해도 이들은 공산주의자가 되는 길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나중에 공산주의자들이 우리사회에서 뺄갱이 취급을 받으면서 모두 억울하게 죽어가야 했다”고 말한다.

일송이 건준에 가입한 것은 몽양과 친했던 박학규를 통해서다. 몽양은 성세빈이 죽었을 때 직접 울산까지 와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 때 성세빈과 함께 보성학교를 세웠던 박학규와 친해져 해방 후 몽양이 박학규에게 건준 참여를 권했고 박학규가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울산에서 건준 간부가 되었던 박학규가 일송에게 건준 울산지부 교육장 자리를 주었다. 일제강점기 교원사건을 통해 항일운동을 펼쳤던 박학규는 해방 후 방어진 건준을 만들고 위원장이 되었다. 지역민들의 신망이 높았던 그는 해방 후 방어진 초대읍장과 2대 읍장을 지내기도 했다.

해방 초 건준활동을 했던 일송은 1946년에는 부산수산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1949년에는 동아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이 무렵 그는 해군사관학교 교수로도 활동했다. 그런데 1949년 7월 그는 해군사관학교 교수생활이 문제가 되어 옥살이를 했다. 자서전 <일송 논설집>에는 ‘해군영창’이라는 제목 속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해 놓고 있다.

“1949년 7월5일 부슬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에 정체불명의 군인 한 명이 지프를 몰고 와 나를 모시러 왔다고 했다. 그것이 SIS에서 나를 체포하러 온 것인 줄 처음에는 전혀 몰랐다. SIS는 나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그것도 해군사관학교 좌익집단의 수괴로 조작하려 했다. 수사관은 조사를 하면서 나에게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 물어 아인슈타인이라고 했더니 나의 뺨을 때리며 ‘아직 이 새끼 맛을 좀 더 보아야하겠군’하면서 다시 물어 이승만이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왜 김일성 장군이라고 바르게 말하지 못하느냐’면서 조서에 그렇게 적었다. 그러면서 공산당 조직표가 그려진 브리핑 차트를 보이면서 내가 그 표의 어느 부서에서 일했느냐고 물어 ‘나는 공산당 문 앞에도 가본일이 없다’고 얘기했더니 수사관이 ‘다 알고 있는데 왜 선전부장으로 활약했다고 말 못하느냐’면서 도장을 억지로 찍도록 했다.”

이 글을 보아서는 그때 왜 일송이 체포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실제로 일송은 해군사관학교 교수로 있을 때 김경출을 일본으로 밀항시킨 일이 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을 수도 있다. 김경출은 1910년 일산진 출신으로 진주사범을 졸업한 후 부산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있을 때 ‘경남적색교원사건’에 연루되어 2년6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해방 후 공산주의자가 된 김경출은 한때 방어진 일대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펼쳤으나 미군정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자 쫓기게 되고 이때 일송이 일본으로 밀항을 시켜주었다. 일본으로 간 후 조총련 간부로 일했던 그는 이후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일본에서 타계했다.

일송은 6·25때도 옥살이를 했다. 이때는 보도연맹 가입자로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부산형무소’라는 제목으로 당시 상황도 자세히 <일송 논설집>에 기록되어 있다. 일송은 이 논설집에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죽을 고비를 42번이나 넘겼지만 이때처럼 억울하고 위험한 때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후에도 그는 1956년 중앙대 교수, 1959년 한양대 교수를 거쳐 1962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자문위원이 되어 대구사범 동기인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자문을 했다. 그는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될 때는 주위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 의장에게 강력히 이 사업을 추진토록 건의했다. 그러나 이후 박 의장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이 나라 공업화에 앞장서게 되지만 그는 박 대통령 가까이 있지 못하고 1963년 인하공대 교수를 끝으로 교단에서 물러난 후 동구 일산동으로 돌아와 칩거하게 된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일송을 아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최고의 물리학자인 그가 이처럼 칩거할 수 밖에 없었던 요인이 건준활동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일송의 경우 건준활동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해도 정치인보다는 물리학자로 교단에 섰을 가능성이 높다. 울산으로 보면 해방 후 좌우익 이념논쟁 속에 아까운 인물이 자신의 꿈을 펴지 못하고 함몰되었다.

필자는 일송이 일산동에 사는 동안 자주 방문해 동구 근현대 인물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그는 성세빈, 성세륭, 서진문, 김경출, 박학규, 박두복, 이미동, 이관술 등 항일 운동가들을 직접 만났다.

따라서 그는 이들의 행적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살아있는 인간 박물관’이었다. 일송은 최근 광주로 이사를 갔지만 이후에도 이메일을 통해 동구 근대사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누곤 했다. 아쉬움은 그의 건준활동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듣지 못한 것이다. 이번에 취재를 하면서도 일송에게 메일을 보내 건준에 들어간 경위와 몽양과의 관계를 물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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