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없어 고뇌하는 지역 젊은이들
양보 않는 기득권층 어떻게 바라볼지
열악한 환경에도 패기로 헤쳐나가길

▲ 박유억 케이알엠에이씨코퍼레이션 대표

해마다 추석 전 가을로 접어드는 길목에 어김없이 실시하는 산소 벌초를 위해 지난 주말 고향 울산에 다녀왔다. 가끔 이렇게 일이 있을 때 고향을 찾는데 그 때마다 느낌이 새롭고, 어릴적 기억이 떠올라 추억에 잠기곤 한다.

필자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경주와 양남 사이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는 조그마한 산골마을에 살았다. 어느날 지금의 농소(차일)로 이사했는데, 그 때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모든 게 충격이었다. 비포장 도로 위의 집채같은 완행버스, 그날 밤 처음 본 대낮같이 밝은 백열등, 이튿 날 동해남부선 철로 위로 달리던 화물열차의 수많은 바퀴 등 신기하지 않은 게 없었다.

당시 우리 집은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산골마을에서 이사 나오면서 남의 빈 집을 얻어 살고 논밭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방과후나 주말에는 부모를 따라 논밭으로 나가 일을 거들고, 동천강 둑으로 소도 먹이러 다녔다. 고단했지만 아름다운 추억이기도 하다. 맑은 백사장 위에 정강이 높이만큼 얕게 흐르는 물을 따라 은어와 송어를 잡으러 뛰어다닌 기억은 언제 되돌아봐도 입가에 미소를 머물게 한다.

고등학교 땐 호계에서 신정동까지 만원 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아침 6시20분께 직장인들의 출근 시간대와 겹쳐 시내버스는 항상 미어터졌다. 차안은 작업복을 입은 현대자동차와 중공업 근로자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그득했다. 안내양이 겨우 문을 닫고 나면 버스기사가 지그재그로 버스를 흔들었다. 신기하게도 승객들은 제자리를 잡았다.

고3 여름방학 때다. 학교의 축구부가 의정부에서 추계축구대회 4강전 시합을 가졌다. 방학기간 중에 학교에 자습하러온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서 급히 대절해준 버스를 타고 응원을 가게 됐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버스기사가 ‘촌놈들을 태웠다’고 서울의 남산을 한바퀴 돌아주었다. 그 남산길을 버스가 돌아가는 순간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아, 복잡한 서울 한가운데에 이런 곳이 있구나! 반드시 서울로 와서 이 길을 걸어봐야겠다.’ 처음 가본 서울, 사실은 땅에 발도 디뎌보지 못한 서울에 대한 촌놈의 꿈은 그렇게 시작됐다. 부모가 집은커녕 생활비를 지원해줄 형편도 못 되었지만 서울생활을 시작할 용기를 가졌던 것이다. 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매사에 인내하며 최선을 다하며, 사회의 보편적인 일원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다.

오랜만에 찾아온 울산은 참 많이 바뀌었다. 인구 30만 정도 밖에 되지 않던, 내 어릴 적 순박하고 서정적인 울산은 어디에도 없다. 상전벽해(桑田碧海)다. 태화강변에 들어선 주상복합 아파트는 울산을 낯선 도시처럼 느끼게 한다. 인구 120만에 노사문제 등 사회적인 이슈와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대도시로 변했다. 대기업이 많은 울산은 사회에 진출하고 직장에 들어가야 할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어 고뇌하고 분노하고 자포자기하고 있는 사회현상의 중심에 있다. 기득권들이 조금 양보하고 도와줘야 할 상황임에도 더 가지고 더 누리려 하는 것은 아닌지, 그로 인해 그들의 아들, 딸, 동생, 조카들의 일자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는 것은 아닌지.

이런 현실을 울산의 젊은이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며, 무슨 추억을 쌓아가고,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어렵고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젊은이다운 패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마부작침(磨斧作針)의 마음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만들어가길 바랄 뿐이다. 잠시 고향 땅에 발을 디디면서 내 젊은 시절이 떠올라 공연히 부질없는 생각이 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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