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 희생을 담보로 한 제사의 모순
가장의 결심으로 충분히 바꿀 수 있어
형식보다 조상 기리는 마음이 더 중요

▲ 김혜준 (사)함께하는아버지들 대표

이번 추석 전날에 온 가족이 단체로 영화를 봤다. 학창시절 단체관람을 해보긴 했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일가족이 극장에서 영화를 본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더욱이 부모님은 극장에서 영화를 본 지가 근 30년 만이었다. 문득 생각난다.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영화 ‘별들의 고향’을 봤던 일이…. 하지만 영화내용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수시로 고개를 숙여야 했던 기억뿐이다. 뭔가 에로틱한 장면이 나올라치면 옆자리의 부모님이 어김없이 내 머리를 내리 눌렀고 나는 귀까지 막아야 했다. 내 뒤통수를 눌렀던 그 손은 누구의 손이었을까? 아버지였을까 어머니였을까?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뒤 부모님과 그 ‘졸개’들 모두가 컴컴한 극장안에 둘러앉았으니 감개가 무량했다. 임금인 아버지가 세자인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동서고금을 통틀어도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 ‘사도’의 내용을 한마디로 줄이면 “아버지 말 안듣고 공부 안하면 죽는다”라던가…?

어쨌든 추석 하루 전날 부모님을 모시고 두 며느리도 함께 영화관람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을미(乙未)개혁 덕분이었다. 을미(乙未)년인 올해, 성당에서 위령(慰靈)미사를 지내는 것으로 제사를 대신하자는 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어머니와 형님 가족들은 가0톨릭 신자였지만, 아버지와 나머지 가족들은 그렇지도 못했다. 그러니 개혁이 가능했던 건 아버지의 실용주의 덕분이다. 아버지는 “제사의 가치란 흩어져 있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정을 나누고 돌아가신 조상을 기리는 것에 있으니, 제사라는 형식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그 취지를 제대로 살려보라”고 하셨다. 그동안 내리막길을 걷던 아버지의 권위가 이번 일로 상한가를 치면서 화기애애의 진수를 맛보게 됐다.

그리고 나서 주변을 살펴보니 가장의 결심에 따라 명절 문화가 바뀌는 사례들이 눈에 띄었다. 시골에서 군수까지 지낸 어떤 분은 이번 추석에 강원도 펜션에 3대에 걸친 일가족을 불러모아 다함께 명절휴가를 지냈다고 한다. 지역에서 명망이 높고 평소 가례(家禮)를 잘 챙기던 일흔이 넘은 분의 표변(豹變)이었기에 놀라왔다. 더욱이 그 분에 대한 칭송이 비난을 훨씬 넘어선다는 점도 이채롭다.

사실 명절에 지내는 제사인 차례(茶禮)는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차를 올리는 간소한 것이었는데, 점점 번잡한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이다. 알아봤더니 성년례, 혼례, 상례, 제례, 수연례 등에 대해 최소한의 내용을 정하여 대통령령으로 시행하고 있고, ‘건전가정의례의 정착 및 지원에 관한 법률’도 떡하니 있었다.

이들 법령의 요지는 ‘간소화’인데, 왜 간소화하자고 할까?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한자들로 가득한 병풍을 쳐놓고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들로 상다리가 휘어지는 방식의 제사가 가족들이 마주앉아 조상을 기리는 데 별 도움이 안돼서 그런 게 아닐까? 청와대에는 매일 직원들이 숙직을 서고 있는데, 자연히 개인 사정에 따라 숙직당번을 바꾸곤 한다. 그런데 명절기간 걸린 숙직은 희한하게도 다른 날보다 바꾸기가 훨씬 수월하다. 왜? 여성 행정관들이 명절숙직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며느리들의 일방적 희생에 힘입어 진행돼 온 제사의 모순을 청와대 숙직실은 묵묵히 웅변해주고 있다.

마침 이번 우리집의 을미개혁은 며느리들을 정조준했다. 생각해보면 집집마다 분위기 메이커는 며느리들 아닌가. 분위기 메이커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는 관습을 붙들고 있으면서 명절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길 바라는 일, 이거 좀 바꿔보는 게 어떨까?

김혜준 (사)함께하는아버지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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