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연구에 평생 바친 외솔의 고향
한글 사랑하는 행사 더욱 확대시켜
외솔, 울산의 인물로 다양하게 기려야

▲ 김영조 위동해운 여객팀장 재경울산향우회 운영위원

유통기한은 음식이 만들어지고 나서 유통될 수 있는 기간을 뜻하며, 식품의 신선도를 나타내는 척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은 판매할 수 없고 공산품은 신상품이 출시되면 이전의 것들은 이월 상품으로 취급되어 제값을 받을 수 없지만 향수(鄕愁)라는 인간의 감정에는 유통기한도 이월이라는 분류도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이달 초 한글날을 시작으로 이어진 3일간의 황금연휴 기간 동안 고향 울산에서는 봉계한우축제, 처용문화제, 한글문화예술제 등 다양한 축제가 청명한 가을 날씨 속에서 성황리에 끝났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축제의 기원은 종교나 문화에 있어서 신성하고 특별한 시간에 대해 기념하고 계절의 순환과 변화 그리고 출산, 성년식, 결혼과 같은 의례의식에 그 본질을 두고 있다고 한다. 과거의 축제가 사회와 공동체, 종교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 간에 정보를 전달하고 결속력을 부여하는 중요한 행사였다면 현대에 와선 휴식과 재충전의 기회와 시간으로 변모됐다.

의미없는 축제는 없겠지만 울산출신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 탄생 121돌을 맞아 외솔기념관과 동헌, 문화의 거리 등 중구 원도심 일원에서 열린 한글문화예술제는 여러 축제 중 백미(白眉)로 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조선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이라면 현세 울산을 대표할 인물은 외솔 최현배 선생이 아닌가 한다.

외솔 최현배 선생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시발점(始發點)이 되는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일어난 1894년 10월19일 울산에서 태어나고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했다. 1910년 상경하여 주시경 선생의 국어 강습원에서 수학하는 동안 민족주의적 언어관에 영향을 받아 평생 국어 연구, 국어 운동의 길을 걷게 된다. 일본에 의해 1910년 한일병합으로 국권을 상실, 우리말은 국어의 지위를 잃고 조선어가 되자 다니던 학교를 졸업하고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교원으로 부임하여 우리말을 연구하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선생은 일제의 굴레로부터 정체성을 지키고 문화 창조의 도구인 국어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어법과 표준말이 정립되어야 함과 우리말을 집대성한 사전의 필요성을 절감케 된다. 그래서 ‘조선어 사전편찬회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어 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1938년 일제가 중국침략을 앞두고 민족주의 단체 회원들을 단속하기 위해 조작한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선생은 경찰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고 연희 전문학교 교수직에서 강제 퇴직을 당한다. 실직 중에도 한글을 역사적 이론적으로 연구한 책을 출판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던 중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해방 후에야 출옥한다. 해방 후 한글 교육운동과 교과서를 집필하고 한자대신 한글쓰기, 세로쓰기 대신 가로쓰기를 통해 한글의 문명화에 큰 족적을 남겼다.

최근 한류 열풍과 함께 한글을 배우려는 외국인이 크게 늘어나고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채택하는 나라도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현실은 어떠한가. 거리의 즐비한 간판, 공공기관의 이름과 지자체의 현수막도 영문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영어문구로 가득한 게 현실이다. 뜻을 알기 위해서 영어를 배워야 하는 주객전도(主客顚倒)의 현실은 ‘한글은 목숨이다’라는 선생의 말씀이 준엄한 꾸지람으로 메아리 쳐 오는 듯하다. 외솔 선생을 기리고 한글을 사랑하는 행사가 널리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김영조 위동해운 여객팀장 재경울산향우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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