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묵객의 詩心 사로잡은 반구대
반구대암각화에 밀려 관심서 벗어나
울산12경 정비 계기로 재조명 필요

▲ 박철종 사회문화팀 부장

울산암각화박물관의 이전검토 소식이 28일자 본보를 통해 처음으로 전해졌다. ‘대곡천 암각화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선행조치로 풀이된다. 울주군은 암각화군 종합정비계획 기본구상안에 이 안을 포함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울산암각화박물관은 2008년 5월30일 당초 울산암각화전시관으로 개관해 8년도 채 안된 건물이다. 어쨌든 이 박물관이 이전될 경우 세계유산 등재에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엿보인다.

‘반구대’와 ‘반구대암각화’는 수년 사이 울산과 관련한 검색어 중에서 최상위권에 올랐던 단어였을 것이다. 지난 2010년부터 준비를 시작한 세계문화유산 등재작업, 오랜 논란을 벌여온 가변형 임시 물막이 댐 설치 등 관심사와 쟁점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반구대’와 ‘반구대암각화’가 주객이 전도된 분위기가 감지된다.

간단히 말하면 반구대는 대곡천 옆으로 거북이가 넙죽 엎드린 형상을 한 언덕이고, 반구대암각화는 태화강 상류 지류인 대곡천 절벽에 위치한 바위그림이다. 반구대에 대한 기록은 <경상도읍지> <헌산지> <울산읍지> 등 옛 기록에서 나타나고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경상도읍지 언양현>(1832) 지도에는 반구대와 요도(蓼島), 반고서원이 표기되어 있다. <울산읍지>(1934)에도 “정몽주가 일찍이 이 고을에 유배되어 하대(下臺)에서 놀았으므로 이제까지 포은대(圃隱臺)라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나오는 하대는 반고사지 앞 반구대다.

그러나 반구대암각화는 1971년 학계에 보고됐고 1995년 국보 제285호로 지정됐다. 따라서 반구대의 이름이 먼저 붙여졌고 반구대암각화는 그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 그런데 ‘반구대’는 간곳 없고 ‘반구대암각화’만 남아있는 듯하다. 울산시가 선정한 울산 12경도 ‘반구대’로 이름 붙였지만 상당수 시민들은 ‘반구대암각화’를 연상한다. 울산 12경은 울산에서 절경이 빼어난 12곳이었을진대 후발 주자 반구대암각화의 유명세에 눌린 것이다. 뒤늦은 지적이긴 하지만 관광진흥 정책의 오류가 아닐까 여겨진다.

반구대는 고려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이 귀양살이를 했던 곳이다. 1375년(고려우왕 1) 언양현에서 2년 가까운 귀양생활 동안 울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초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도 이곳에서 명시를 남겼다. 그래서 반구대 아래 작은 구릉지인 포은대(圃隱臺)에는 이 삼현의 행적을 기록한 반고서원 유허비(槃皐書院 遺墟碑)와 포은대영모비(圃隱臺永慕碑)가 세워져 있다. 포은대(圃隱臺)는 반구대에서 글을 남긴 정몽주 선생을 기려 따로 불렀던 이름이다. 회재는 경상도관찰사로 재임시 반구대를 찾은 적이 있었고, 한강은 반구대 일원에 머물며 살고 싶어 했다고 한다.

울산대곡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특별전 ‘울산을 다녀간 7인이 알려주는 이야기’에서 이런 사실이 포착됐다. 지난 13일 개막해 오는 12월27일까지 계속 될 특별전에는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반구대 일원을 거쳐간 7인의 흔적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울산시가 울산 12경(景)을 재정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울산 12경은 한·일 월드컵축구를 계기로 관광진흥 차원에서 선정됐다. 반구대(盤龜臺)는 지난 2002년 울산 12경(景) 중 하나로 선정된 명소다. 이 시점에서 반구대와 반구대암각화에 대해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할듯 싶다.

박철종 사회문화팀 부장 bigbell@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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