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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그림이 있는 에세이
[그림이 있는 에세이]자연 읽기 - 윤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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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1.05  17:5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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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秋景 박현율 作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절이다. 산길을 가다 문득 뒤돌아보면 인생의 가을이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다.

구월 중순만 되어도 산마을에는 월동 준비가 시작된다. 이미 벌레 소리가 잦아들고 풀과 나무는 단풍을 준비하느라 미동도 않고 엎드려 있다. 자연 따라 나도 가을 설거지를 시작한다. 이른 감은 있지만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한 채 겨울을 맞을 수도 있을 만큼 변화무상한 날씨 때문이다.

잦은 가을비를 맞고 웃자라 우묵한 풀부터 뽑는다. 그냥 두면 풀씨가 떨어져 순식간에 귀곡 산장이 되고 만다. 풀만 없애면 되는 것도 아니다. 워낙 식구들의 면면이 다양해 집 주변 설거지를 하려면 이들의 속내를 살필 줄 아는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모든 생명체가 공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덕목이다.

그 중에 내 간의 끈을 좌지우지하는 녀석도 있다. 볕살이 따끈한 날은 더욱 조심하고 그들의 질서를 흔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뱀은 기온이 내려가면 실제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어느 때는 녀석이 체온을 올리기 위해 돌 위에서 볕을 쬐기도 한다.

그래서 정원에 설 때의 내 모양새는 땅꾼차림이다. 장화에 목이 긴 고무장갑을 끼고 목도리를 두른 후 모자를 쓴다. 뱀뿐만 아니라 벌이나 날벌레들의 심기를 본의 아니게 건드렸을 때도 대비해야 한다. 화초나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을 수도 있기에 나는 미리 신호를 보낸다. 그들이 알아차릴 정도의 부드러운 느낌을 담아 호미의 등으로 돌이나 화초를 톡톡 친다. 나올 일이 있으면 잠시 기다려 달라거나 가던 길이면 서둘러 가라는 신호다. 서로 만나 봐야 소통에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사는 방식이 다르니 존중해 주는 것이 공존의 방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생명체의 무리 속에 있으니
혼자 있어도 결코 혼자가 아니야
살아있는 것은 나름의 질서가 있어
그 질서가 존중되면 和而不同(화이부동) 이뤄


언제나 평화롭고 품위 있는 관계가 유지되는 건 아니다. 더러 놀라기도 한다. 나 못지않게 녀석들도 스르르 소리로 신호를 보내는 등 애를 쓰고 있지만 맞닥뜨리면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어느 때는 머리를 내밀다 녀석이 더 소스라치기도 한다.

여름이 무르익을 즘 판판한 돌 위에 망사 스타킹을 벗어 놓은 듯 녀석들이 성장의 상징물을 점잖게 남겨 놓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호기심과 함께 기가 꺾인다. 내 집 밑에 본부를 두고 느긋하게 들락거리며 은연중에 위협 아닌 위협을 하면서 긴 세월 저들의 지분을 누릴 것 같아서다. 내심 사람들의 계산법과는 차원이 다른 듯해 내 권리는 꺼낼 엄두가 나질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녀석들보다 내가 우월한 구석이 별로 없다. 단 한 가지, 도망가는 일은 그럭저럭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마저도 녀석들이 작정만 하면 내 발은 얼어붙고 말 테니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발도 없는 것이 땅 위로 물속으로 돌 틈으로 나무 위로 가시덤불 사이로 머리만 들어가는 곳이면 못 가는 곳이 없다. 심지어 이 녀석들은 바위 위에서 돌을 던지듯 사방에 하나씩 새끼를 떨어뜨려도, 어미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솔방울처럼 툭툭 떨어뜨려도 살아남는다.

이런 녀석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터전에 뜬금없이 들어와 사는 내가 감히 우위를 과시라도 한다면 ‘간 봉지’가 가방처럼 따로 메고 다닐 만큼 커야 할 것이다. 사람 사이에도 예의를 차릴 때 마찰이 줄어들 듯이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 윤경화씨는 ·수필가 ·울산문인협회 회원·울산수필가협회 회원


산마을에 오기 전, 현관문 하나만 닫으면 가족 외에 어떤 생명체와의 접촉도 피할 수 있는 생활을 반백 년 넘게 해왔다. 요즘처럼 핵가족화 된 가족제도에서 아이들이 성장해 떠나면 집이란 공간은 생명체의 공간이라고 하기에 어쩐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을 정도다. 모두가 무생물이다. 남편과 나도 소리내어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무생물로 변한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과감한 탈출을 했다. 우리 부부는 생·무생물 모두가 쉬어 가라는 의미로 ‘만물정’을 이루었다. 혼자 있어도 생명체의 무리 속에 있으니 혼자가 아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나름의 질서가 있고 그 질서가 존중되면 화이부동의 세계를 구가할 수 있음을 몸소 체득하고 있다.

   
▲ 박현율씨는 ·한국화가 ·개인전 6회 ·울산한국화회 회장 ·울산미술협회 부회장 역임

산마을의 질서에 무지한 이방인의 길들이기는 사철 내내 이루어지지만 특히 늦여름과 초가을은 아주 위험하다. 월동을 위한 야무진 몸 만들기를 끝낸 터줏대감들을 잘못 건드린 날에는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다. 겸손하고 진지한 자세로 자연의 일부가 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미 자연의 질서에 대한 학습이 제법 되어 가고 있음을 이따금 느낀다. 사람만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보다 그들의 방식을 존중하려 애를 쓰고 있다. 그 대가는 상당하다. 나를 걷게 하고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고 향기에 감동하고 미소 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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