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커닝"(cunning)은 이제 일상적이다시피 하다. 부끄럽다. 한국 최고의 명문이라는 대학도 예외가 아니다. 강의실 벽면은 물론 책상 위는 온통 그 "부정행위"의 흔적으로 도배되다시피 한다.  30년 전 70년대의 학생들도 간혹 커닝은 했지만 그때는 부끄러운 줄 알았다. 그리고 전공과목에선 감히 엄두도 못 냈다. 지금은 교양과목은 물론이고 전공과목까지 자행된다. 그래서 커닝은 이제 특별한 것이 아닌 일상이 되어버렸고, 화두로서의 가치도 엷어진지 오래다.  학교 당국의 끈질긴 작전(?)도 소용이 없다. 책상을 잘 지워지거나 잘 써지지 않는특수재질로 바꿔도 보고, 매 학기마다 흰 페인트로 도색도 해보지만 학생들의 놀라운활약(?)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어느 제법 잘 나가는 서울의 한 대학에선 학생들 스스로 커닝추방 캠페인을 벌이기도 하고, 어떤 데서는 감독을 철저히 해서 부정행위를 원천봉쇄하는 순발력을 보이기도 한다.  요즘 학생들의 커닝은 지능적이라기 보다 대담하고 뻔뻔스럽다. 그 부정행위를 적발하면 부끄러워하기 보다 재수없다는 듯이 "남들 다 하는데 왜 나만?"하는 식이다. 마치 교통위반 단속처럼 "재수없이 나만 걸렸다"는 투다. 뉘우치는 기색이전혀 없다.  며칠 전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학부의 홈페이지 게시판은 커닝이 화두였다. 마침내 한 여학생이 비장한 각오로 이런 글을 게시판에 올렸다. "컨닝도 대학 문화인가? 전국 최우수 학부로 평가된 것 부끄럽지도 않은가? 자성하자. 우리 이제 그러지 말자."  이 글에 대한 한 학생의 반응은 충격이었다. "삶은 선택이다. 커닝도 당당한 선택이다. 나에게 그 선택권을 달라. 커닝 자체의 옳고 그름은 난 모른다. 그러는 너나 잘해라."  그것도 익명 아닌 실명으로. "커닝도 선택이니 그 선택권을 달라"는 것도 놀랍지만, 더욱 나를 개탄스럽게 만든 건 "난 컨닝의 옳고 그름에 대해선 모른다"고 한 것이었다. 컨닝은 나쁜 것이라는,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라는 "기본적 가치"를 그는 송두리째 무시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시대가변했고, 기술이 인간의 감정까지 통제하는 마당이지만 이건 좀 차원이 다르다. 사람 사는 게 뭐 별건가?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자기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그는 부정하고 있었다.  우리의 대학 교양교육의 목표는 어느 대학이건 간에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지성인의 양성"이다. 그렇다면 그런 보편적 가치를 가르치고 실천하지 못하는 대학의 교양교육은 왜 존재하는가? 어쨌든 대학에서의 보편적 가치는 몰락해 가고 있다.  마침내 나는 모종의 부정행위 방지작전(?)을 시험하기로 했다.  첫째 방식은 대학원 조교들을 총동원하여 무려 세 명이 감독하는 삼엄한 작전(?) 아래 시험을 치루는 것이었다. 효과는 있었으나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둘째는 커닝이아예 무의미하도록 출제를 별나게 하는 것이다. 역시 효과는 있었으나 출제가 예사롭지 않았다. 1시간 짜리 시험 출제에 꼬박 3일이 걸렸고 논리성을 검증하느라 애를 먹었다. 세째는 주어진 시간 안에 다 풀지 못하도록 문제수를 대폭 늘리고 아예"오픈 북"으로 답을 쓰게 하는 것이다. 책을 뒤지느라 야단이고 책에다 탭을 내서 답 찾는 시간을 절약하는 학생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도 정작 실력이 아닌 책 빨리찾는 실력(?)을 시험하는 것 같아서 이도 저도 만족할 만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 시험에는 마지막 방법으로 그들의 "알량한" 자존심에 기대보기로 했다. 시험문제지 머리에 이렇게 대문짝 만하게 인쇄해 놓았다.  "대한민국 최우수 학부생인 우리들은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컨닝을 하지 않는다"  이번 시험에서는 그 "부정행위" 적발이 한 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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