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의 오른팔이었던 최형우 전 장관
조문정치 와중에도 충심 어린 오열
통합과 화합 재조명되는 계기 되길

▲ 추성태 정치경제팀장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난 22일 빈소에서 격하게 오열하는 백발의 노정객이 세인의 이목을 끌었다. 몸이 불편해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던 그는 영정 앞에 덥썩 주저앉아 대성통곡해 주위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YS 옆에서 평생 정치고락을 같이했던 울산출신의 최형우(80) 전 내무장관이었다. ‘우(右)형우, 좌(左)동영’이라는 말처럼 그는 YS의 오른팔이자 ‘민주투사’였다. 5공 초기 민주산악회 부회장, 민추협 간사장 등을 맡으며 YS옆에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선 그는 때론 심복이었고 때론 정치적 동지였다. YS 대통령 당선 뒤에는 민자당 사무총장과 내무장관을 지내는 등 문민정부의 2인자로서 화려한 정치경력을 쌓았다.

그러던 최 전 장관은 62세이던 1997년 3월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수술을 받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YS가 병실을 찾아 “나요 나. 빨리 일어나야지”라며 손을 잡았으나 알아보지 못했다. 최 전 장관은 그러나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섰다. 혼자서 몸을 가눌 정도는 아니지만 인지능력만큼은 정상수준이다. 가족들은 그의 뇌졸중 발병이 과거 고문후유증이라고 했다. 정치권에서 가장 ‘불운한 정치인’으로 회자되고 있는 팔순의 노정객은 첫날부터 영결식 전날까지 나흘내내 ‘주군’의 빈소를 지켰다. 다른 정치인들은 상주역할을 자임하며 ‘조문정치’를 했지만 그에게는 정치도, 조문도 아닌 회한과 오열의 자리였다.

서생 출신인 최 전 장관은 울산이 낳은 거물정치인이다. 4·19 민주혁명 당시 동국대 학생대표 출신으로 6·3, 삼선개헌 반대 등에도 참여한 그는 36세 되던 1971년 울산에서 8대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된뒤 9, 10대 의원에 연속 당선됐다. 이후 부산으로 지역구를 옮겨 13, 14, 15대까지 6선 국회의원과 정무장관, 내무장관 등을 역임, 정권의 실세로 두각을 나타냈다. 1997년 역사적인 울산광역시 승격도 그의 실세시절 성사됐다. 김 대통령이 울산시민들의 염원을 받아들여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내걸자 공약을 실행에 옮기고 방법을 찾고 경남도 등 타지역의 반발을 무마하는 등 뇌졸중으로 쓰러지기전까지 정치적 막후역할은 그의 몫이었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만약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지 않았으면 울산은 지금보다 얼마나 더 발전했을까. 1996년 15대 총선에서 6선 고지에 오른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임기를 1년 정도 남겨놓은 1997년 초 당시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인 이회창 고문과 여당내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그 무렵 쓰러지지 않았다면 대선후보나 정권재창출 여부를 떠나 거물정치인으로서 고향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을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정치인들에게 장례식장은 조문정치의 장이다. 고 김 대통령의 빈소에서도 여러 형태의 조문정치가 이뤄진다. 여권에서는 정치적 대척점에 서있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서청원 최고위원 등 ‘상도동계’ 사람들이 만사를 제쳐놓고 조문객을 맞고 있다. 야권에서는 칩거중이던 손학규 새정치민주연합 전 상임고문이 매일 빈소를 찾고 있다. 대부분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 등을 이유로 들고 있지만 정치적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한 시각이 많다. 어떻든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그의 ‘통합과 화합’의 정신이 재조명되고 있다. 이번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좌와 우, 보수와 진보, 여와 야,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등 어떠한 정치적, 이념적, 지역적 구분없이 모든 국민이 하나되는 통합과 화해의 장이 되길 기대한다.

추성태 정치경제팀장 choo@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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