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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그림이 있는 에세이
[그림이 있는 에세이]음덕에 기대어 - 이지원집안에 몰아닥친 우환에 원망 생겨도
제삿날만 되면 홀린 듯 제사상 차려
관습의 유전인자는 언제나 이런 모습
오늘도 관습의 제문 외우며 허리 굽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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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2.03  17:5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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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체 진열(Fossils on display) - 주한경 作. : 일상은 항상 생성과 소멸의 반복 속에 놓여 있다.

오늘은 뵌 적 없는 아버님의 제삿날이다. 꾸덕하게 마른 생선을 꺼낸다. 제사상이나 차례상에는 생선을 올리기 마련인데, 우리 집에서는 조기, 민어, 돔을 빠뜨리지 않는다. 조상님이 좋아하시고 밀어주시고 도와주신다는 믿음에서다.

명절이나 제삿날이 다가오면 매번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고 편치 않은지 모르겠다. 늘 해오던 일인데도 해를 거듭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부담은 줄지 않는다. 돌덩이 같은 부담감의 근저에는 이 일을 물려받을 사람이 내게 없다는 일종의 자격지심이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집안의 맏며느리인 나는 딸만 둘이다. 둘째까지 딸을 낳고 나니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산모인 나는 정작 아무렇지도 않았다. 적어도 출산한 그날은 그랬다. “공주 둘이면 어때. 괜찮아, 괜찮아!”라며 남편은 거듭 강조하며 목소리를 띄웠다. 그러던 남편이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오늘 만우절이라고 나에게 거짓말하는 거지?” 은근히 물어오는 말을 듣고 그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다.

둘째를 낳은 다음날부터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이 전부 내 탓인 것만 같아 누운 자리가 자갈밭처럼 편치 않았다. 대놓고 말씀은 안 하셨지만 큰며느리가 또 딸을 낳았다고 어머님이 머리를 싸매고 누웠다는 소식까지 날아들었으니 심신을 편안케 하는 산후조리는 물 건너간 셈이었다.

둘째가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셋째를 낳아야 하나로 고민을 했다. 직장을 다니고 있던 터라 아이들을 남의 손에 키워야 했기에 하나를 더 낳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들을 낳을 자신이 없었다.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한 나는 이십오 년 동안 이런저런 곡절을 겪으면서 꿋꿋하게 딸 둘을 키웠다. 그래도 아들은 있어야 한다던 생각이 바뀌어 요즈음은 딸이 더 좋다고 하는 세상이 되었다.

언젠가부터 명절이 되면 공항은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다. 북새통을 이룬 공항 로비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우리 집만 고리타분하게 차례를 지내고 있나 싶을 정도다. 오랜 동안 이어온 뿌리 깊은 유교사상이 서서히 퇴색돼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세월 앞에 변치 않는 것이 무엇이던가. 환경이 바뀌고 생활이 바뀌고 규범이나 제도마저 바뀌어 간다. 하지만 이어져 내려오는 관습이나 집안 법도를 단칼에 끊어버린다는 것이 내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 ■ 이지원씨는
·수필가
·한국문협 회원
·울산문협 회원
·울산수필가협회 회원
·수필집 <무종>

혼기에 이른 딸들은 출가하면 우리 가풍과는 크게 상관이 없어진다. 내가 몸이 성할 때까지는 제사를 모실 수 있겠지만 어느 시기가 되면 작은집 조카에게 이 제사를 물려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면 얼마나 대를 이어갈지 의문이다. 있는 제사도 합치고 없애는 마당에 고려시대처럼 딸이 제사를 모시던 때가 다시 올 리는 없을 것이다.

십 년도 더 전에 ‘나는 제사가 싫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이 나온 적이 있었다. 유생들은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가당키나 한 말이냐며 노발대발 했지만 한 방울의 물이 모여 둑을 트듯 변화가 밀려들고 있는데 막을 수 있을까.

   
▲ ■ 주한경씨는
·서양화가
·개인전 10회(울산, 서울)
·울산미술협회 회장 역임
·신라미술대전, 대구미술대 전 심사위원 역임
·한국미협 서양화 분과 이사

명절이나 제사가 목전에 닥치면 집안의 여인들은, 특히 맏며느리나 맏이 역할을 하는 며느리는 시작도 하기 전에 명절 증후군에 시달린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명절이며 제사인가 싶은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명절 하루를 보내기 위해 드는 비용과 심리적 부담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해오던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관습을 거부하지 못하는 데에는 조상님들로부터 측량하기 어려운 위안을 얻는다고도 믿고 싶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집안에 태풍이 지나간 적이 있었다. 좋지 않은 일은 한꺼번에 일어났다.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삶의 의욕마저 꺾여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제사가 다가왔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제사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간 나 나름대로 정성을 들였다고 생각했는데도 밀어주고 도와주시기는커녕 집안에 우환을 몰아주는 것에 대한 원망이 절로 나왔던 것이다.

마침내 제삿날이 되었다. 머리 싸매고 오전 내내 누워 있다가 부지불식간에 몸이 자동인형처럼 벌떡 일어나졌다. 머리는 깨질 듯 아팠지만 무엇에 홀린 듯 장을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속성으로 장보기를 마치고 몇 시간 만에 상을 차렸다. 내게 새겨진 관습의 유전인자는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지나온 날과 지금, 그리고 다가올 날이 독립적인 세계가 아니라는 것,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 진다는 인식이 몸에 배여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일이기도 했다.

섣달 한겨울에 든 아버님의 제삿날은 늘 맵찬 바람이 분다. 손질해 둔 조기와 민어, 돔을 찜솥에다 넣고 찐다. 마음을 모아 제수음식을 진설한다. 우리 대에서 끝날지도 모를 일이지만 종부인 친정어머니로부터 보고 배웠던 관습의 제문을 중얼중얼 왼다. 부디, 좋아하시고 자손들을 밀어주시고, 도와주시기를…. 손을 모아 허리를 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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