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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박윤선]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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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2.31  17:5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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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시선이 차창너머 허공으로 날았다. 공중에 뜬 아이는 몸도 가벼운데다 무력해서 거리에 선 사람들이 고개를 꺾어 들만큼 큰 호(弧)를 그린 다음에야 지상에 떨어졌다. 여자는 아이의 몸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고 같은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보았다. 잠시 멈췄던 숨을 되돌려놓느라 고개를 숙인 여자의 뇌리에 짧은 섬광이 스쳐갔다. 어느 때부턴가 줄곧 반복되고 있는 현상… 딱히 집어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하지만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느낌. 지난날의 어느 틈엔가 똑같은 일을 겪었던 것 같은 기시감이었다. 여자는 이번에도 일어난 적이 없었던 기억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팔목에 돋아난 소름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사건을 맡았다는 조사관에게선 옅은 담배 냄새가 났다. 앞머리와 이마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 쉰은 족히 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눈 밑의 그늘은 장시간의 업무로 쌓인 피로를 짐작케 했다. 그냥 본 대로만 얘기해주면 되는 겁니다. 조사관은 일상적인 일이라는 듯 가볍게 말을 시작했다. 목격자는 진술만 끝나면 보내 주니까요. 살다보면 별의별 일 다 겪는 법 아닙니까? 커피라도 한 잔 뽑아줄까요? 여자는 배가 고팠다. 생각해보니 아침을 먹지도 못했고 시간은 벌써 정오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십여 분 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어수선한 식탁도 그대로 두고 나온 참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커피 말고 밥, 이라고 말하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경비교통과의 창가에는 손때가 들어 거뭇거뭇한 철제 책상이 기역자로 배열되어 있었다. 책상 사이에는 녹색의 칸막이가 가로 혹은 세로로, 원래 그 자리에서 나고 성장한 나무처럼 서 있었다. 가림막으로 나뉜 공간에는 각기 다른 기류가 흘렀는데 여자는 그 이유가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의 차이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어 있는 공간에는 그만큼 평온한 공기가 고른 숨을 쉬듯 깔려 있었던 까닭이다. 여자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돌아보다가 반대편 창가 쪽에서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자락을 늘어뜨린 남자를 발견했다. 등을 돌리고 앉은 남자의 자세는 몹시 불편해 보였는데 등받이가 달린 빈 의자가 곁에 놓여있었음에도 일인용 원목 스툴을 택해 앉은 탓이었다. 앞으로 비스듬히 뻗어 나와 있는 긴 목과 구부정한 등허리까지, 남자는 마치 억지로 앉은 자세를 취한 거북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냥 본 대로만 얘기해주면 되는 겁니다.
흰색 아반떼에 치이는 것을 목격하셨단 거죠?
집중 좀 하세요. 그 다음은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혹시, 아이… 엄마에요? 여봐요, 그냥 가면 어떡해.”


자판소리가 멈춘 것은 그때였다. 이름요, 아줌마. 이름. 조사관의 찡그린 표정으로 보아 이미 몇 번의 재촉이 지나간 듯했다. 주민등록번호요. 여자가 대답했다. 주민등록번호… 칠육공사, 아니, 칠육공삼…이… 번호가 끝내 떠오르지 않자 여자는 조사관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혀를 끌끌 찬 조사관이 검지로 회색 에나멜 토트백을 가리켰다. 곧이어 여자의 손에 자주색 장지갑이 나타나고 책상 위로 넘어온 조사관의 손이 신분증을 낚아채갔다. 딸려 나온 영수증 하나가 여자의 발치를 향해 뉘엿뉘엿 떨어졌다.

   
▲ 일러스트 : 윤문영

자, 그러니까 오늘 오전 아홉 시경, 문청초등학교 앞 이차선 도로를 운전하고 계셨다. 맞지요? 네. 그런데 도로를 건너던 아이가 흰색 아반테에게 치이는 것을 목격하셨단 거죠? 여자는 망설였다. 사고가 나는 순간? 사고가 일어난 후를 봤다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조사관이 고개를 들었다. 여자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의 흐름이 점차 빨라지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럼, 목격자분의 승용차는 어느 차선을 주행 중이었습니까? 서 있었어요, 옆 차선에. 자판을 두드리던 소리가 멈췄다. 한결 낮아진 음성으로 조사관이 그 이유를 물었다. 아이가 길을 건너고 있었으니까요. 조사관이 한 손을 들어 듬성듬성한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목격자분, 말씀 잘 하셔야 합니다. 여자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상대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헷갈렸다. 아까는 본 대로만 이야기하면 된다더니. 그럼, 피해자가 어디쯤 걸어가고 있을 때 사고가 일어났습니까? 그게, 저는, 그 아이가 제 차 앞에 있을 때만 봐서요. 리드미컬하게 울리던 자판소리가 다시 멈추자 여자의 양 어깨는 오목하게 움츠러들었다. 여자는 자꾸만 주눅이 드는 자신의 태도가 싫었다. 선수를 친다면 이 위압적인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을까. 늦어서요. 아들이 유치원에 다니는데… 색연필을 빼먹고 갔어요. 그거 갖다 주려고…… 사고가 일어났을 때는, 시계를 보고 있었어요. 아홉시… 십일 분, 정확합니다.

조사관의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가 다섯까지 세었다가 다시 열을 세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묻지도 않은 말을 여자가 덧붙였다. 학교 앞이잖아요. 어린이 보호구역이라 별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조사관이 느린 어조로 동의했다. 맞습니다. 어린이 보호구역이지요. 다시 자판소리가 들려왔다. 피해 아동이 목격자 분 차 앞을 지나갈 때 간격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간격… 여자는 기억 속에 담겨있는 아이의 행적을 더듬기 시작했다. 불현 듯, 한 장면이 여자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손등을 볼록하게 모으고, 두 개의 손가락을 세워서, 소나타의 보닛 위를 누비던 조막만한 손.



여자가 아이를 처음 발견한 것은 내리막 경사도를 막 탔을 즘이었다. 검정, 노란 색이 줄줄이 박힌 점퍼와 파란 가방은 먼 거리에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이미 등교 시간이 지나서 다른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눈길이 닿을만한 곳에 횡단보도를 두고도 일반 도로가에 서 있었다. 지나는 차량을 따라 연신 고개를 돌리던 아이가 달려오는 여자의 은색 소나타를 발견했다. 아이는 오로지 그녀만을 기다려왔던 것처럼 시선을 움직이지 않았다. 반면 여자는 망설였는데, 차를 멈추는 것이 귀찮았다기보다 또 다시 습관적으로 남을 생각하는 자신이 싫어서였다.

평소에도 여자는 스스로 불편을 감수하는 일이 많았다. 줄을 설 때도 자신보다 늦게 도착한 사람에게 물러나주기 일쑤였다. 어떤 이는 고마움을 표했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에도 여자는 후회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선의를 베푸는 것이 왠지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그러한 자신에게 염증이 이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여자도 독한 마음을 먹고 버릇을 고쳐보려고 했다. 그러나 정작 타인을 외면하려는 순간이면 여자의 머리에는 돌연 붉은 신호등이 번뜩이는 것이었다. 당연히 가야 할 목적지를 놓치게 된다거나 약속시간에 늦게 되는 일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은색 소나타는 서서히 속도를 늦추어 아이 앞에 멈춰 섰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도로에 내려선 아이는 소나타 앞 범퍼에 바짝 붙은 채 걸었다. 그러다 소나타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보닛에 앉은 먼지를 뚫어지게 보았다. 걸음을 멈춘 아이가 손가락으로 보닛 위를 슬쩍 건드렸다. 끝이 올라간 짧은 직선 하나가 허연 불순물 위에 나타났다. 그때부터, 아이의 손가락이 종횡무진 소나타의 보닛 위를 훑기 시작했다. 굽실굽실한 문양이 마음에 들었는지 설핏 미소까지 지었다. 여자의 손이 브레이크 페달을 밟고 있는 오른다리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주먹을 쥐고 신경질적으로 허벅지를 두드려대었다. 차량용 시계를 쳐다보는 여자의 미간 사이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댄스곡을 연주하는 것처럼 경쾌한 자판소리가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몸통을 알 수 없는 꼬리말이 자판 음 틈틈이 끼어들었다. 갔습니까, 라던가 했습니까, 같은 말들이. 트렌치코트 차림의 남자를 취조하고 있는 조사관이었다. 남자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불안정한 숨소리만 여자의 귀에 또렷이 들려왔다. 여자는 텅 빈 공간에 남자와 자신, 단 둘만이 갇혀 있는 착각이 들었다.

여자의 몽롱한 정신을 깨우기라도 할 것처럼 조사관이 책상을 탁탁 두드렸다. 여자는 좀 전의 질문을 떠올린 다음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까웠어요. 가까웠어요? 어느 정도? 조사관이 물었고, 여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 마지못해 답을 했다. 잘 모르겠네요. 제가 앉은키가 작아서 범퍼 앞이 잘 안보이거든요. 잠시 여자를 쳐다보던 조사관이 맞은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어이, 사망한 아이 말야. 신장이 어떻게 되지? 하지만 조사관의 우렁찬 목소리에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는데, 교통조사과내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벽면에 부착된 TV화면에 향해 있기 때문이었다.

방영되고 있는 프로그램은 아들이 즐겨 보아서 여자도 곧잘 보게 되는 코미디 프로그램이었다. 지하철 안이 배경인 듯했고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곁에는 한 아이가 기다란 풍선을 입에 물고 있었다. 낯익은 여자 코미디언은 불량스러워 보이는 행색의 출연자에게 격앙된 목소리로 따지고 들었다. 길쭉한 그 무엇이 자신의 엉덩이를 지속적으로 건드렸다며 하소연했다. 말다툼 중에도 남자 출연자 옆에는 예의 그 꼬마가 길고 탱탱한 풍선에 제 볼을 부풀려 바람을 넣고 있었다. 풍선의 위치는 정확히 사내의 사타구니 높이였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경비교통과내 사람들에게서 간간이 웃음이 흘러나왔다. 야, 저거 억울하겠네. 누군가 그렇게 말을 했고, 저게 바로 미필적 고의 아냐. 체크무늬 점퍼의 조사관이 말을 받았다. 먼저 말을 던진 사람이 아니, 저게 어떻게 미필적 고의입니까? 누명을 쓴 거지, 라고 재차 묻자 체크무늬가, 저 놈 말고 꼬마 말야, 꼬마가 미필적 고의를 저지른 거라고, 했다. 미필적 고의? 여자가 중얼거렸다. 어느새 함께 T. V.를 보고 있던 담당 조사관이 여자를 흘깃 보았다. 사건에 영향을 미칠 줄 알면서도 실수를 하는 행동입니다. 순 과실이 아니란 말이죠. 여자가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화면 속의 꼬마는 풍선을 부는 행동에만 몰입하고 있었다. 여자가 보기에 꼬마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는 것 같았다.

피해자 신원 나왔습니다.

조사관의 뒤편으로 다가와 보고를 한 여경은 남색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앞섶의 금색 단추와 어깨에 달린 견장이 어우러져 완벽한 조화를 이룬 모습이었다. 여경은 자신을 주시하는 여자의 시선을 모른척하며 서류를 내밀었다. 하필이면 창으로 스며든 햇살이 제복의 금빛 견장에 정면으로 닿았다. 반사된 빛은 곧장 여자의 눈언저리로 날아와 희롱하듯 어른거렸다. 여자는 눈을 끔벅이며 그들이 뱉어 놓은 아반테나 시속 백이십 킬로, 면허취소란 단어를 들었다. 트렌치코트 남자에 대한 사고전적을 보고하는 것 같았다. 마주앉은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함부로 말을 뱉는 그들의 무신경함에 여자의 기분이 언짢아졌다. 블라인드 좀 내려주세요. 한층 높아진 여자의 목소리에서 진한 짜증이 배어나왔다.

트렌치코트의 남자는 제복의 등장에도 아무런 미동을 하지 않았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양 손에 든 종이컵만 뚫어져라 보았다. 하지만 여경의 보고가 시작되자 서서히 고개를 든 남자가 무어라 말을 꺼내며 끼어들었다. 참다못한 체크무늬 조사관이 한 마디를 했고 남자의 시도는 일단락되었다. 그 때부터였다. 남자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어버린 듯 쉴 새 없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금방이라도 깨질 듯 텅 빈 유리알 같은 눈동자는 경비교통과내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다. 우연이었을까. 그 모습이 여자의 눈에 낯설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의 눈빛을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해내려 애썼다. 혹시 몇 번 건너 아는 사람은 아닐까. 그러다, 익숙한 섬광이 또 다시 눈앞에 번뜩였고 그 찰나의 시간 사이에 잊어버리고 있던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밥을 먹다가도 말을 하다가도 어린 여자를 바라보곤 했던 얼굴. 푸르고 어둑한 낯빛으로 손바닥을 열어보이던… 아버지.

여자는 이번엔 밀려오는 기억을 막아보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풀려버린 고리 하나. 그 시작을 내버려두면 여태껏 지탱해왔던 방어벽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기억의 파편은 또 다른 기억들을 줄줄이 끌고 와 여자에게로 쏟아내었고 여자는 무방비상태로 그 봇물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월요일이었고 여자가 아홉 살 되던 해의 가을이었다. 온 집안을 울리는 현관문 소리에 여자는 쥐고 있던 연필을 놓치고 말았다. 달깍. 부러진 연필 심지가 방바닥을 도르르 굴러 책상 밑으로 들어갔다. 현관에는 여자의 아버지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두 손을 펼쳐 보이며 서 있었다. 품에 안기라는 것인지,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라는 뜻인지 알 수 없어 여자는 당황스러웠다. 그런 탓에, 붉은 액체가 말라붙은 아버지의 손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못 살 거야. 아버지의 입에서 익숙한 소주 냄새가 풍겨 나와 집안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아버지는 여자의 어머니가 가져다준 수건으로 손을 닦아내면서도 다른 말이 없었다. 한참만에야 아버지는 세발자전거를 탄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는 차도 한 복판에 있었다고 했다. 오토바이는 도로 밖으로 튀어나가 바퀴 하나가 빠지고 몸체가 부서졌다. 아버지는 못 살 거야, 라는 말을 후렴구처럼 반복했다.

여자의 아버지는 평소 살갑게 가족을 챙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동차 부속을 생산하는 하청업체의 팀장으로써 가족에게 꼬박꼬박 월급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가장의 임무를 다했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늦은 귀가는 자연스러운 일상이었고 여자를 비롯한 가족은 가끔씩 그가 오토바이 핸들에 달고 오는 붕어빵이나 호떡만으로 그의 역할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불행만 아니었다면, 훗날 여자가 의식적으로 아버지를 지우려 애쓰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여자의 아버지가 신발을 벗고 거실에 올라서려던 순간,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현관문 밖에는 경찰복 차림의 두 남자가 서 있었다. 여자의 아버지는 그들과 함께 문밖을 나섰고 그 해가 다가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린이 보호구역이잖아요. 아이에게 배려해야지요.
아이더러 빨리 지나가라고 손을 흔드셨냔 말입니다.
몰랐어…… 아이의 몸이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목격자 분, 집중 좀 하세요.


조사관의 표정에는 미뤄지고 있는 업무에 대한 불만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케이스인데 말야. 여자는 조사관의 말을 곱씹었다. 골치 아픈 케이스… 반복되는 자판소리에 여자의 신경이 예민해졌다. 탁,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습니까… 탁, 그 다음은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탁, 탁, 탁…… 조사관은 내리깐 목소리로 취조를 계속했다. 아이를 발견했을 때의 상태는요? 가해자가 어떤 조치를 취했습니까?

아반테는 삼십여 미터 앞에 정차해 있었다. 흐릿한 연기가 새벽녘 해무처럼 피어올랐다가 아침 햇볕에 사그라지는 것처럼 흩어졌다. 도로 위에 그려진 스키드 마크는 금세 찍어놓은 낙인처럼 생생했다. 공중에서 내리꽂히고 있는 아이는 파란가방에 매달린 인형이나 액세서리 같았다. 칼끝 같은 사람들의 비명에도 인체가 부서지는 소리는 묻히지 않고 울렸다. 여자는 그 모든 상황을 목격했다.

텅 비어 있던 거리는 단 몇 분 만에 구경꾼들로 메워졌다. 사람들의 탄식에선 당혹스러움과 함께 묘한 안도감이 붙어 나왔다. 소나타에서 내린 여자가 아반테 옆을 지나칠 때,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가 운전석 문을 열고 튀어 나왔다. 남자는 내려서자마자 뛰었다. 최선을 다하는 듯했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위태위태했다. 결국 몇 발짝 더 가지 못하고 남자가 멈추었다. 양 손을 무릎에 짚은 채 몰아쉬는 남자의 호흡을 따라 위아래로 코트 자락이 흔들렸다.

   
▲ 일러스트 : 윤문영

실제로는 연한 담청색이었던 아이의 가방은 아이와 한 몸인 것처럼 걸려 있었다. 상체는 기형적으로 뒤틀려 있었고 안구는 반쯤 눈꺼풀을 벗어나 있었다. 벌어진 두개골에서 쏟아진 뇌수와 혈액은 부채꼴을 그리며 차도를 잠식해 나갔다. 비릿한 냄새에 여자의 뱃속에서 욕지기가 올라왔다. 손을 들어 입을 막는데 눈앞에 작은 원이 중심을 향해 돌았다. 다리가 꺾이자 차도의 요철이 무릎에 박혀 들었다. 여자는 양 손을 바닥에 짚어 나머지 몸까지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했다. 숨을 고르는 중에 손바닥에 축축한 습기가 느껴졌다. 두 손이 붉게 물든 것을 확인한 여자가 어쩔 줄을 몰라 하자 둘러싸고 있던 사람 중의 누군가 휴대용 티슈를 건넸다. 혹시, 아이… 엄마에요? 구경꾼이 물었고 여자는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가 멈춘 다음 다시 내저었다.

남자는 차도에서 줄곧 서성이기만 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본인도 판단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진정하세요. 여자는 그에겐지 자신에겐지 모를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요란한 경적 소리가 차도 끝에서 들려왔다. 여자와 남자의 차가 도로를 가로막고 있어서 예닐곱 대의 차량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발걸음을 떼는 여자의 팔을 누군가 붙잡았다. 여봐요, 그냥 가면 어떡해. 설명을 하고 싶었던 여자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알은 척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어떤 신호였던 것일까?



촘촘하게 늘어선 사람들 사이에 삐뚜름한 균열이 일어났다. 늙수그레한 노파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허방한 발걸음이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의 동작과도 비슷해 보였다. 노파는 구경꾼들의 어깨와 팔을 밀치면서 앞으로 나섰다. 불시에 무례를 겪은 구경꾼들은 욕이라도 할 작정으로 뒤돌아보았다가 노파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노파의 늘어진 눈매와 입가에는 지금껏 살아온 세월이 한 순간에 공중분해 된 것에 대한 회한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여자는 노파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고 확신했다.

일정한 높낮이의 사이렌 소리가 거리에 울렸다. 여자는 제일 먼저 도착한 경찰차를 향해 부리나케 다가갔다. 경찰차의 문을 열고 뒷좌석에 앉은 여자를 운전자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돌아보았다. 목격자에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여자가 말했다.



쿠당탕……

느닷없는 소리에 수런거리던 사람들의 음성이 일시에 멈췄다. 태풍에 뿌리째 뽑혀 나간 나무처럼 칸막이가 쓰러져 있었다. 나뉘어 있던 서로 다른 질감의 공기가 드러누운 칸막이를 넘어 조급하게 섞여들었다. 조사관이 여자의 뒤쪽을 주시한 채, 경계를 갖추는 사냥개처럼 일어섰다. 여자가 돌아섰을 때, 트렌치코트의 남자는 여자의 두어 걸음 앞에 도착해 있었고 그 뒤를 체크무늬 차림의 조사관이 허겁지겁 쫓아오고 있었다. 남자는 단시간에 백 미터 거리를 완주한 사람처럼 거친 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남자가 마침내, 그렇잖아요… 아줌마, 라고 말하고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두 경찰이 동시에 허허로운 숨을 후, 쉬었다. 하지만 안심한 것도 잠시, 한 손을 들어 올린 남자가 과장된 몸짓으로 허공을 휘젓기 시작했다. 애가 무척, 작았잖아요? 그 쪽 차 앞에서 그냥 불쑥 튀어 나왔는데 나더러 어쩌라구. 거기 오늘 첨 가본 길이란 말입니다… 아, 어쩌다 내가 이런 일에 엮인 거지?

여자도 남자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어떡하다 이런 일에 엮였을까. 집을 나섰다가, 굳이 슬리퍼를 바꿔 신으러 돌아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아니면 칠층이나 구층 사람들이 승강기를 삼분쯤 더 잡고 있을 수는 없었을까. 그러면 학교 앞에 당도했을 때 아홉시 십삼 분이나 십오 분쯤 되었을 테고, 아이는 벌써 차도를 건너갔거나 적어도 옆 차선에 지나가는 차량 따위는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남자는 말을 내뱉는 동안에도 여자를 관찰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가 입을 열 때마다 드러나는 혓바닥의 백태만 쳐다보았다. 대여섯 시간은 찌들어 있었던 숙취가, 고기 찌꺼기 냄새와 더불어 여자에게로 덮쳐왔다. 뒤로 한 발짝 물러선 여자를 따라 남자가 바짝 다가섰다. 아니, 나만 책임 있는 겁니까? 그렇잖아요. 그쪽이 아이를 건너게 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왜 생겨요? 양심적으로 그런 생각 안 들어요?

트렌치코트의 위협에 엉뚱하게도 여자의 뱃속이 반응을 보였다. 꾸르륵. 점점 더 허기가 심해지고 있었다. 아직 준비물을 가져다주지도 못했는데… 여자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귀여운 아들을 생각했다. 성실하게 일하고 있을 남편과 그리고 남은 우리의 인생… 여자에겐 지켜내야 할 것들이 있었다. 경찰서를 나서면 우선 요기를 할 음식점부터 찾으리라, 여자는 결심했다. 그런 다음 유치원 미술수업에 늦지 않게 색연필을 가져다 줄 거야.

자신도 모르게 여자의 입에서 새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양심적이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모르시나본데 거기, 어린이 보호구역이잖아요. 당연히 아이에게 배려해야지요. 여자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고개까지 치켜들었지만 남자는 오히려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에 고무된 표정이었다. 여자는 동조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비교통과 내에서 제대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자, 같은 상황을 여러 번 겪어서 무엇이 효과적인 답인지 알고 있는 사람. 여자는 고개를 돌려 담당 조사관을 응시했다. 다섯을 세며 기다렸지만 그는 보탬이 되어줄 생각은 없는 듯 팔짱을 풀지 않았다.

의기양양해진 트렌치코트가 여자의 코앞까지 제 얼굴을 들이대었다. 여자는 풀려버린 다리를 대신해 곁에 놓인 의자의 등받이를 잡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담당 조사관의 얼굴이 저만치 앞에 보였다. 그 순간, 굳어 있는 조사관의 표정 뒤에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를 여자가 포착했다. 조사관의 의사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감추려 들어도 들킬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 같은 거였으니까. 여자는 머리에 떠오른 단어를 입속으로 음미했다. 미필적 고의. 조금 전만 해도 경멸해마지 않던 줄을 여자는 힘껏 부여잡았다.

정면으로 남자의 시선을 마주한 여자가 냅다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듣자하니 당신, 예전에도 사람을 쳤다면서? 무려 백이십 킬로로 달리다가. 놀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사람들에게서 들려왔다. 여자는 다리에 힘을 주고 한층 더 큰 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 보니까 당신, 아주우 상습범 아니야?

남자의 눈자위에 서늘한 그늘이 퍼져 나가는 것을 여자는 지켜보았다. 동시에 여자를 담당하고 있는 조사관의 볼에도 지저분한 홍조가 번졌다. 헛기침을 두어 번 뱉고 난 담당 조사관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가해자분, 여기서 이러신다고 본인에게 좋을 것 하나도 없습니다. 자리로 돌아가세요. 남자는 그 짧은 몇 분 사이 최소한 한 뼘은 쪼그라든 듯 보였다. 체크무늬 점퍼를 입은 조사관과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는 나란히 걸어 제 자리로 돌아갔다.

여자는 머리를 꼿꼿이 들었다. 계속된 질문에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담당조사관은 이따금 한쪽 입술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마침내 기본 조사가 끝나고 조사관은 다시 연락이 갈 것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고 여자에게 전했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여자가 되도록 소리를 내지 않게 주의하며 의자를 뺐다. 가벼운 목례를 하고 앞만 바라보며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어엇!

여자가 출입문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 다급한 외침이 벽걸이TV 아래 정수기 앞에서 들려왔다. 소리가 난 곳에는 작은 폭포 같은 물줄기가 희부연 햇살을 가르며 쏟아지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기색의 젊은 경찰이 품에 안은 생수통의 방향을 재빨리 돌렸지만 물은 이미 반 이상 엎질러진 상태였다. 공교롭게도 물웅덩이는 트렌치코트의 남자를 향해 퍼져 나갔다. 남자는 구두가 젖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창밖만 내다보았다. 오그라든 목이 한층 더 옷깃 속으로 숨어들어 표정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과 아우성이 제각각으로 흩어지는 가운데 여자는 조용히 출입문을 닫았다.



석 달여 동안 여자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잊을 만하면 가해자 측에서 연락을 해오거나 집으로 찾아왔다. 여자는 침착하게 대응했고 어느 식으로든 상대방의 언성이 높아질라치면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그럴듯한 정황을 내세우며 회유와 설득을 거듭했다. 생각을 해보세요,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따지고 보면 잘못한 점이 하나도 없다고요. 하지만 여자가 현장에서 겪은 일을 조목조목 전하고 나면 그들은 금세 풀이 죽었다. 그러곤 남자의 아들이라는 갓난쟁이의 사진을 여자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시대가 달라도 가족을 구제하기 위한 레퍼토리는 똑같아서, 예전 여자의 집에 모여든 삼촌과 고모들이 취한 방법과도 다르지 않았다. 여자의 친척들은 경찰서를 드나들 때마다 한 뭉텅이의 현찰과 함께 여자의 가족사진을 가지고 나갔다. 그 정성 덕분이었는지 날이 풀리기 전에 여자의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피해자 측에선 아무 연락이 없었다. 두어 번, 말을 하지 않는 전화만 걸려 왔을 뿐이었다. 처음 그러한 전화를 받았을 때, 여자는 가슴 언저리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돌덩이 하나가 뚝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곧,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비척대며 걸어오던 노파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도 없는 이야기를 머릿속에 만들어내며 노파와 아이, 아이와 노파의 관계를 맞춰보곤 했다.

오전 여덟시 오십분. 여자는 아들의 손을 잡고 유치원 통학버스를 태우러 나갔다. 쓰레기 처리장에 들러 들고 간 쓰레기봉투를 던져 넣는 것도 여전했다. 버스좌석에 앉은 아들의 눈을 마주쳐주고 버스의 꽁무니가 사라질 때까지 자리에 서서 바라보는 일상도 계속되었다. 다만 오후 세시 이십분쯤, 유치원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에 아파트 앞으로 마중을 나가는 일과는 달라진 점이었다. 아파트 정문 앞이 아니라 도로의 맞은편에 정차하는 하원운행경로 때문이었다. 이미 그 전부터 지속되어온 일이었지만 그 위험성을 새삼 깨달은 여자는 유치원에 버스의 운행경로를 바꾸어 줄 것을 요구했다. 유치원 측에선 동승한 교사가 길을 건너는 아이들의 안전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다며 양해를 구했다.

여자는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는 아들의 손을 꼭 잡은 채 파란 신호등이 들어와도 곧바로 횡단보도를 건너지 말라고 일렀다. 이렇게, 이렇게, 지나가는 차가 없는지 보고 건너야 돼. 좌우로 고개를 돌리는 시범은 여자의 아버지가 며칠이 멀다하고 여자에게 일러주었던 동작이었다. 여자의 아버지는 길을 건널 때의 요령뿐 아니라 모퉁이를 돌아설 때의 안전한 위치, 마주 오는 자전거를 피하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나중엔 반복되는 레퍼토리를 외우다시피한 여자가 아버지의 말에 뒤이어 끝을 낼 정도였다.

오후 일곱 시 십분, 저녁식탁에 앉은 여자가 아기 코끼리가 그려진 멜라민 컵에 개봉한 우유팩을 조심스럽게 기울였다. 어린 아들은 포크에 꽂힌 토스트를 씹느라 조그만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울린 휴대폰 벨소리가 여자의 시간을 방해했다. 여자의 귓속으로 근엄하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아, 접니다. 담당 조사관. 기억하시죠? 문청초등학교 교통사고. 팔짱을 끼거나 머리를 어수선하게 긁던 조사관의 모습이 떠올랐다. 네, 잘 지내셨어요? 아들을 재워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조사관은 헛기침을 한 뒤 말을 꺼냈다. 다른 게 아니고, 사고 현장이 찍힌 CCTV화면이 증거자료로 제출되었는데 말이죠. 소나타는 워낙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처음엔 몰랐는데… 조사관의 말꼬리가 수상쩍게 늘어졌다. 여자는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피해자가 지나갈 때 말입니다. 혹시 손짓을 하셨었나요? 그러니까, 아이더러 빨리 지나가라고 손을 흔드셨냔 말입니다.

하얀 우유가 식탁 위에 쏟아졌다. 엄마, 쏟았어. 어린 아들이 내지르는 소리에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싱크대 위에 아무렇게나 나뒹굴던 행주를 집은 여자가 급하게 식탁 위를 훔쳤다. 건너편의 당사자는 말없이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 여자는 행주를 개수대에 던진 뒤 멜라민 컵에 우유를 다시 채웠다. 그런 적 없는데요. 여자는 다른 손으로 휴대폰을 바꿔 쥐었다. 멀리서 찍혔다면서요? 얼굴을 만지거나 그랬겠죠. 손짓을 한 적은 없어요, 절대로. 조사관이 응답했다. 그러시군요. 여자는 짧은 숨을 들이마진 후, 건조한 목소리로 의사를 전달했다. 지금 바빠서요. 이만 끊어도 될까요?

통화를 마친 후, 여자는 식탁 의자에 앉아 채 비우지 못한 자신의 밥그릇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식욕이 끊어져버려 숟가락을 들고 싶지 않았다. 남은 음식물을 모아 개수대 안에 털어 넣고 연필 자국이 무성한 앉은뱅이책상을 꺼내왔다. 오늘 아들이 해야 할 숙제는 ‘다리’ 와 ‘다람쥐’ 란 단어를 여덟 칸짜리 공책에 열 줄을 쓰기였다. 다…리. 여자는 한 단어씩을 쓸 때마다 되풀이해 읽는 아들의 중지를 잡아 연필교정기의 홈에 끼워 주었다. 다섯 번째 ‘ㅏ’ 에서부터 글자가 삐뚤빼뚤해지기 시작했다. 힘을 모으려고 동그랗게 그러쥔 아들의 손을 바라보던 여자는 순간 등허리 아래에서부터 열기가 오르는 것을 느꼈다. 여자는 숨을 고르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자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어 연거푸 두 컵 분량의 물을 들이켰다. 안방으로 건너가 화장대 서랍 속을 뒤졌다. 약병 안에 남아 있던 신경안정제 세 알을 꺼내어 한꺼번에 삼켰다.

열 시가 가까워지자 여자는 펭귄 캐릭터가 지그재그로 놓인 잠옷을 아들에게 갈아입혔다. 작은 몸뚱이를 가볍게 안은 다음 볼에다 입을 맞추었다. 그러면서, 어쩌면 어린아이의 몸이란 것은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할까, 생각했다. 아이 방을 나서자 쏟아지듯 약기운이 돌았다. 눈꺼풀이 금방이라도 마주 붙을 듯 무거웠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지 못한 여자는 금세 일어날 요량으로 옷을 입은 그대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모로 누운 시선을 따라 돌아간 TV화면에는 아들이 즐겨보아서 여자도 보게 되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재방영하고 있었다. 여자의 팔과 다리가 내려앉으며 혼란스러운 머리까지 꺼질 듯 소파 아래로 가라앉았다.



꿈을 꾸었다. 아니, 꿈이 아닌지도 몰랐다. 여자는 도로 한 복판에 서 있었다. 지나다니는 차도 행인도 보이지 않아 유령만이 사는 도시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급하게 차량이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담청색 가방이 여자의 시야에 들어왔다. 가방에 제 몸을 맡긴 아이는 무지개처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여자가 뛰었다. 최선을 다해 팔을 흔들고 다리를 움직였다. 아이가 바닥에 닿기 전에… 늦지 않게… 그러나 어쩐 일인지,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발이 길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주먹만 한 납덩이가 다리마다 하나씩 붙어있는 것 같았다. 뛰어가는 것을 포기한 여자가 울음인지 외침인지 모를 고함을 질렀다. 얘야, 나는 몰랐어… 하지만 여자의 목소리는 미로처럼 복잡한 골목 사이로 흔적 없이 사라질 뿐이었다.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어……

아이의 몸이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끝>



[당선소감-박윤선]우연찮게 들어온 고리가 인생 바꿔…온전히 살아남는 소설 쓸것

   
▲ 박윤선

꿈을 꾸었습니다. 손위친척이 여러 개의 촛불이 꽂힌 케이크를 들고 등장했습니다. 생일이 아닌 터라 어리둥절했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축하한다는 말에 활짝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선통보를 받고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은 길 위에서 보낸 시간들이었습니다. 소설을 배우기 위해 장거리 버스를 타고 다녔던 길, 바닷가를 따라 도서관으로 걸어가던 길, 막힌 구상을 풀려고 무작정 헤맸던 골목길….

아직도 소설의 어떤 의미가 저를 그렇게 몰아댔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우연찮게 들어온 고리 하나가 제 인생을 바꿔놓았고 지금껏 그 열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란 사람을 어디에 데려다 놓을지, 어떤 모습으로 변화시킬지 계속 따라가 보려 합니다. 미욱한 작품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적지 않은 불편을 기꺼이 감수해준 가족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진정한 작가로서의 태도를 몸소 보여주시는 이순원 선생님, 감사합니다. 부끄럽지 않은 제자의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의견 나눠주신 소설교실 문우님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200칸 이야기’ 회원 여러분과도 기쁨 나누고 싶습니다. 자괴감으로 힘들어하던 시기에 위로를 보내주었던 문우님들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메모장에 오늘의 할 일을 적어봅니다. 전 달에 시작한 소설의 다음을 써 나갈 차례입니다. 내일의 할 일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온전히 살아남는 소설을 쓰겠습니다.
-약력-
●1970년 대구 출생
●1992년 울산대학교 섬유디자인과 졸업
●2012년 서울 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현재 경남 통영시 거주


[심사평-이동하] 날카로운 시선·극적상황 짚어내 서사하는 문장력이 섬세

   
▲ 이동하

본심에 올라온 열 편을 읽고 다음 네 작품에 주목했다. ‘목도리’ ‘손’ ‘사월의 눈’ ‘언터처블 내 인생’.

외국인 노동자들의 작업현장을 핍진하게 그려낸 ‘목도리’는 문장이나 플롯이 아직은 덜 다듬어진 감이 있고, 한 때는 치열한 노동화가였으나 지금은 승복을 입고 자연염색에 몰두해 있는 첫사랑 남자와의 재회를 그린 ‘사월의 눈’은 나름 잘 다듬어진 대신 신선함이 떨어졌다. 결국 두 작품이 남았는데 두 편 다 글쓰기의 내공이 만만찮음을 느끼게 하고 아울러 신인다운 새로움도 보여주고 있어 이 중 하나를 버리기가 주저되었다.

고심 끝에 ‘언터처블 내 인생’을 내려놓은 까닭은 ‘대머리’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작품이 활달한 상상력과 은근한 해학성에도 불구하고 다소 가벼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손’은 나무랄 데가 별로 없는 수작이다. 특히 인물의 내면을 읽어내는 날카로운 시선과 미묘한 극적상황들을 한 올 얽힘 없이 짚어내어 서사해 가는 문장력이 놀랍도록 섬세하다. 어디에 내 놓아도 신춘당선작으로 빠지지 않는 소설일 성싶다. 기대되는 신인을 얻어 기쁘다.
-약력-
●1942년 경북 경산 출생
●서라벌예술대학 졸업
●1966년 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
●1967년 <현대문학> 장편소설 당선
●목포대학, 중앙대학 교수(정년퇴임)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역임
●김동리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역임
●저서 <매운 눈꽃>(단편집) <장난감 도시>(장편) 등

경상일보, KSIL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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