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유포석보(柳浦石堡) : 제1편, 울산의 바다를 지키기 위해 유포(柳浦)에 석보(石堡)를 만들다 -

▲ 유포봉수대와 석축형 위곽.

울산 도심으로부터 무룡산 남쪽 고개를 넘어 북구 강동동의 정자항에 이르면, 동해를 향해 야산을 감싼 유포석보(柳浦石堡)라고 불리는 돌로 쌓은 작은 성곽을 만날 수 있다.

석보(石堡)란, 영성(營城), 진성(鎭城) 및 읍성(邑城) 등 일반적인 성곽에 비해 규모가 작은 석성(石城)을 뜻하는데, 유포석보가 바로 그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의 고적(古跡) 조에 ‘유포석보는 세조(世祖)때 쌓아 병마절도사가 군사를 나누어 지켰는데, 지금은 없다’고 기록돼 있고, 울산 최초의 읍지인 <학성지(1749)>와 <연려실기술> 등 여러 읍지와 지지서에도 유포석보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소이한 내용이 수록돼 있다.

정자항 일원의 작은 성곽으로
1452년 돌로 다시 쌓다 중단
숱한 곡절 겪은뒤 7년뒤 완공
유포봉수대 인근에 위치 추정
북구 강동동 어딘가에는
초창기 모습 남아 있을듯

울산의 유포(柳浦, 현재의 울산광역시 북구 강동동 일원)에 성곽(城郭) 조성과 관련된 최초의 문헌기록은 <문종실록> 5권, 즉위년(1450년) 12월22일의 기사로 ‘울산군(蔚山郡) 유포(柳浦)는…왜적(倭賊)이 왕래하는 곳인데, 4면(여러 곳)에서 구원할 수 없으니 변란(變亂)이 일어날까 염려스럽습니다. 청컨대 유포(柳浦)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여서…’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기록을 통해 볼 때, 유포석보를 만든 이유가 왜적(倭賊)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돌로 쌓은 석보(石堡)가 있기 이전, 나무기둥을 서로 엮어 땅에 꽂아 세운 목책(木柵)이 우선적으로 설치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것으로 유포지역이 중요 방어기지라는 뜻의 ‘요해처(要害處) 유포(유등포(柳等浦))’로 언급된 내용이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 수록되어 있다.

▲ 유포석보 항공사진.

다음으로 <문종실록> 12권, 문종2년(1452년) 2월12일 기사에는 충청도 서산의 읍성과 더불어 울산의 유포에 석보(石堡)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유포 일원은 목책에서 석보로 성곽의 형태가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축성(築城, 성 쌓기) 공사는 같은 해 9월에 중단돼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이후 한동안 유포석보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세조실록> 1권, 세조1년(1455) 윤6월의 기사에 ‘…울산(蔚山) 유포성기(柳浦城基, 유포성을 만들 자리)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 옛날의 목책(舊柵)으로부터 5리(里) 정도에 있는 옛 연대(古烟臺, 옛 봉수대) 북쪽 변두리에 성(城)을 쌓는다면, 바다를 곁에 끼고 험준한 지역에 의지하게 되고 수원(水源)도 마르지 않으며…민간 촌락과도 멀지 않아서 그 수호를 엄하게 할 수 있습니다…이제 측량해 보니 유포성기는 그 주위가 1492척(尺)이었습니다. 고을로 하여금 새로운 성터(新基)에 목책[柵]을 설치하게 하고, 가을을 기다려서 성을 쌓도록 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와 같은 기록들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1450년 유포 일원에 목책을 설치하였고, 1452년 2월에는 목책을 거두고 돌로 쌓아 석보(石堡)로 변경하던 중 같은 해 9월에 중단되었고, 이후 1455년 윤6월에 기존의 성터를 벗어나 새로운 장소를 물색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상황이 여의치 않아 새로운 장소에 석보를 쌓는 공사는 큰 진척을 보지 못했다.

이후 <세조실록> 6권, 세조3년(1457) 1월29일 기사 ‘…울산은 유포(柳浦)에 다만 목책만 설치하고 있으니 방어(防禦)가 허술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본포(本浦 = 유포)에 석보(石堡)를 축조해야 할 것이며…방어(防禦)가 가장 시급하니, 반드시 풍년을 기다려서 이를 축조(築造)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와 <세조실록> 14권, 세조4년(1458) 10월9일 기사 ‘지난번 유포(柳浦)의 석보(石堡)를 쌓는 것을 일시에 거행하기가 어려워서 이를 정지하였습니다…청컨대 유포석보를 쌓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에서 1457년 이후 유포석보를 쌓자는 움직임이 다시 일어났음을 알 수 있고, 장기간을 소요한 뒤 1459년에 결국 유포석보의 완공을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간단히 정리하면 표와 같다.

▲ 유포석보와 정자항.

한편, 앞의 <세조실록> 1권, 세조1년(1455) 윤6월의 기사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현재의 정자항에 위치한 유포석보 조성 이전에 초창기의 유포석보가 유포면 일원의 다른 장소 어딘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옛날의 목책(舊柵)으로부터 5리 정도에 있는 옛 연대(古烟臺, 옛 봉수대) 북쪽 변두리에 성(城)을 쌓는다면…’이라고 한 대목은 초창기의 유포석보가 현재의 유포석보로부터 남쪽으로 5리 정도 떨어진 옛 봉수대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여기서의 옛 봉수대는 현재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는 ‘우가산 유포봉수대’이므로 초창기의 유포석보는 유포봉수대 인근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현재 우리들이 정자항에 가서 살펴볼 수 있는 유포석보는 숱한 곡절을 겪은 뒤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 이전 강동동 어딘가에 유포석보의 초창기 모습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미스터리(mystery)를 던져주고 있다. 그리고 다른 봉수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담(墻) 형태의 석축형(石築形) 위곽이 현재의 유포봉수대 주변에 남아있는 것은 유포석보의 초창기 모습과 관련해서 우리들에게 묘한 메시지(message)도 전해주는 듯 하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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