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산태극수태극 영남알프스 18경
14)천황산 재약산 사자평

▲ 재약산 정상에서 본 사자평. 산 아래 초지가 평균 해발 800m의 사자평원이고, 멀리 보이는 산군은 배내봉에서 영축산으로 이어지는 영남알프스 준봉들이다. 영남알프스학교 제공

사자평 가는 길…화전민의 가뭇없는 이야기

영남알프스에는 오르지 않으면 볼 수가 없는 두 곳의 고산분지가 있다. 하나는 신불산과 영축산 사이에 있는 신불평원이고, 다른 하나는 천황산과 재약산, 향로산, 시루봉, 재약봉 등 고산준봉에 에워싸인 평균 해발 800m의 사자평이다. 신불평원에서 푸른 동해가 보인다면, 광활한 초원을 숨기고 있는 사자평에서는 잘 헹군 구포국수 가락 같은 실타래 길을 관망할 수 있다. 탐방대는 사자평을 에워싼 실타래 길들을 누비며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살았던 화전민들의 가뭇없는 이야기를 담아보았다.

조석으로 나물 한보따리 캐고
척박한 땅 일궈 농사도 지어
소·사슴 방목지로도 금상첨화
소문난 나물로 식당도 들어서

탐방대는 먼저 330만㎡(100만평)이 넘는 사자평을 에워싼 천황산-재약산 능선 길을 탐방했다. 그 다음엔 건너편에 있는 향로산~칡밭재~고사리분교~주암쉼터~사기전~샘물상회로 이어지는 시오리 사자평 마을길을 돌아보았다. 향로산에서 바라보는 사자평의 광평추파(廣坪秋波)를 선인들이 왜 재약팔경 중에서 으뜸으로 치는지를 알 수 있었고, 천혜의 초지를 틀어막고 있는 코끼리바위가 사자평을 지키는 수호신임을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자평을 알려면 먼저 광활한 고산분지를 받들고 있는 사자평의 특이한 지형을 파악해야 한다. 사자평을 받든 산군들의 사면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뤄져 있는 반면, 안으로는 대규모 스키장이 들어서도 될만한 대(大)평지를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주변 소쿠리 모양의 산군들이 사자평을 에워싸고 있으니, 가히 그 속에 든 대평지는 무풍지대라 할만하다. 그렇잖아도 일제강점기엔 일본인이 스키장을 조성하려다 무산된 적이 있었고, 도기를 좋아하던 일본인이 고급 도자기를 묻어두고 떠났다는 설도 전해온다. 지금도 사자평에는 사기전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고, 도요지군에는 깨어진 도자기 조각들이 나온다.

탐방대의 사자평 이동경로는 과거 십리 간에 뚝뚝 떨어져 있었던 사자평 마을길이었다. 허리까지 차는 억새도 억새였지만 으악새마저 구슬피 울어, 지나가기가 못내 애틋했다. 이른 아침에 오르면 억새이슬에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기도 하였다. 이 지역의 특산식물인 돌배나무 열매를 주워먹는 노루를 만나고, 새끼 달린 멧돼지 떼와 마주쳐 혼비백산 줄행랑을 놓기도 했다.

▲ 하늘 아래 가장 높은 학교였던 1966년 고사리분교. 억새 지붕과 흙담 교실, 작은 운동장에서 찍은 여덟 명의 학생과 선생님. 동화 속에 나오는 알프스 소년소녀 모습이다. 김원호(부산 거주)씨 제공

하늘이 숨긴 땅에는 누가 살았을까

사자평마을은 세상과 단절된 산간오지였다. 일명 텐트촌 혹은 화전촌으로 불렀다. 이들 텐트촌은 십리 간에 뚝뚝 떨어져 있었다. 열댓 가구가 살았던 수미봉 아래 고사리분교 인근 초원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화전촌이다. 도자기를 굽던 도예공들의 후세들이 화전을 일구며 살았고, 일류 기술을 가진 도예공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명 주개대가리로 불리는 등 너머에는 일곱 가구가 살았고, 칡밭재에는 서너 가구, 삼호낙농목장 인근에도 여러 집이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오갈 데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이 무주공산 사자평에 모여들면서 80가구까지 늘어났다. 표충사 방향 평원의 대평원을 두루뭉술 사자평마을이라 불렀고, 배내골 장선마을로 내려가는 고개엔 칡이 많아 칡밭이라 했으며, 재약산 수미봉 아래 고사리를 재배하는 마을을 고사리밭 혹은 파밭이라고도 불렀다. 탐방대가 직접 발품을 팔아보니 고사리분교에서 칡밭까지는 약 4㎞, 반대로 목장까지는 약 5㎞나 되는 길이었다.

울주군 상북 거리마을에 살던 이화자(90) 할머니는 소싯적 어른들을 따라 사자평엘 간 걸음이 있었다. “열여섯 살 시집오기 전 일임더. 처자 때 어른들 따라 오두메기 넘어 천황산까지 갔어요. 무지 험한 주계덤 거랑길 따라 올라갔심더. 자갈 줄줄 내려오는 소랫길 새새에 숯굽는 사람이 보였어요.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골짝 빠져나오니 동네가 나오데요. 나무라곤 없는 그 만당은 넓고 기운 좋고 억새와 나물 많은뎀더. 산 아래 저 동네가 여름에도 얼음이 언다는 밀양 얼음골이라 합디다. 세상에 이런 데도 있구나. 너무 깊어 못 살겠더라요” 당시를 그는 이렇게 기억했다.

화전민들은 척박한 땅을 개간하고, 10년은 족히 간다는 억새 지붕을 이었다. 사내들은 막장일이나 다름없는 산판일이나 숯굽는 일을 하거나 싸리 소쿠리, 억새 광주리, 나무 함지를 만들어 언양장과 팔풍장, 아불장에 내다 팔았다. 아낙들은 억새밭을 태운 땅에 감자를 심었다. 방목의 이점이 있는 초지엔 흑염소와 소를 키웠다. 330만㎡의 넓은 땅, 무주공산 사자평의 검은 흙은 노다지이자 하늘이 내린 축복의 땅이었다. 특히 감자나 당근, 도라지, 더덕, 고사리, 칡 농사가 잘 되었으나 변덕 심한 대자연 날씨 탓에 나락 농사는 되질 않았다. 곡식이 귀한 곳이라 아이들은 꽁보리밥은커녕 감자와 지천에 널린 나물로 배를 채우고 끼니를 때웠다.

▲ 고사리분교 앞에서 명물식당을 운영하며 학교 청소를 도맡았던 우일남 할머니. 할머니가 부르는 사자평 나물노래는 심금을 울린다. 영남알프스학교 제공

단절된 땅에서 가장 큰 문제는 자라는 아이들의 교육과 교통의 불편이었다. 아이들이 늘어나자 화전민들은 경남도교육청에 거듭된 진정을 하기에 이르렀고, 1966년 수미봉 아래에 고사리를 베어내고 산동초등학교 사자평분교를 지었다. 고사리밭 부근에 학교가 있어 ‘고사리분교’라고 불렀다. 고사리분교는 한때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학교도 자연히 1996년 문을 닫았다.

범이 사라진 사자평은 소들의 천국이었다. 밀양 단장면과 울산 언양을 오갔던 어느 소장수가 “소 수백 마릴 풀어놓으면 사자평이 누렇게 변해”라고 말한 적이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사자평 소’와 ‘배내골 사슴’ 하면 알아주었다. 배내골 사슴은 한국전쟁 직후 배내골로 이주해 온 부산 감천동 태극교 교인들이 사슴목장을 일구었고, 사자평 소는 부산 백도광씨 부부가 삼호낙농목장을 설립하면서 그 규모가 커졌다. 현재 사기전에 방치되어 있는 을씨년스러운 2층 폐허가 바로 그 목장이다.

백씨는 1968년에 남매를 데리고 사자평엘 들어왔었다. 어린 남매 중 백은실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만점 졸업생이 되었고, 석사 없이 옥스퍼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교수로 있다고 한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인 그녀는 “나를 키운 것은 사자평이었다”는 추억담을 남겼다. 사자평 최후의 화전민 김하용씨는 “200마리가 넘는 얼룩빼기 젖소를 사자평에 방목해 키웠다. 목장엔 일꾼들이 먹고 잘 숙소도 있었다”고 했다.

▲ 팔풍팔재. 삽화 김성동(울산사생회 회장)

 

산에서 굶어 죽으면 바보야

한편 입소문으로 산행객들이 늘어나자 흑염소와 닭, 도토리묵, 동동주를 파는 장삿집이 들어섰다. 하지만 이들이 살던 땅 대부분은 표충사 소유의 사찰림이었다. 살생을 한 염소 핏물이 층층계곡을 타고 흘러내려가자 급기야 표충사에서 퇴거를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거부한 화전민들은 한 가구당 700만원씩을 모아 버티기 소송을 벌였다. 7년간의 긴 민사소송 끝에 패소한 화전민들은 쫓겨나고 사자평마을은 고사리분교와 함께 1999년 철거되었다.

사자평은 대문 없는 나물 곳간이었다. 약초 산으로 알려진 재약산 비알에는 온갖 나물이, 천황산 사자바위에는 석이버섯이 많이 났다. “소목장 인근이 나물 밭이었어. 사자평 나물 캐러 갔다가 밀양 아불 사람과 배내골 사람 만나면 서로 아르렁거렸지. 산불이 잦아서 부드러운 미역추가 많은데다 자기네 구역이라고 못 넘어오게 했거든” 고사리분교 앞에서 명물식당을 운영했던 우일남 할머니의 말이다.

사자평 나물은 화전민들을 먹여 살렸다. 딸이 다니는 고사리분교 청소를 도맡아 했었던 우 할머니는 “산에서 굶어 죽으면 축기, 쪼다, 온달이다”고 일침을 놓고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아침에 한 보따리 따고 저녁에 또 한 보따릴 땄다. 그 나물 보따리 말캉 이고 표충사에 팔러 가” 우 할머니는 나물 보자기를 배와 허리에 차고 열십(十)자로 등에도 메었다. 그것도 모자라 꽁꽁 눌러 싼 나물 보따리를 머리에 이면 얼굴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우 할머니는 사자평에서 부르던 나물노래를 사박사박 들려주었다.

산이 높아야 골도 깊으다

조그마한 여자 속이 얼마나 깊을쏘냐

외로운 이내 마음 억새에 담아주소

불어오는 바람 따라 나도 데려가 주소

사자평 나물노래(노래 우일남, 발굴 배성동)

 

▲ 배성동 소설가
▲ 김성동 화가

“표충사로 내려가면 나물 사려는 사람들이 층층폭포까지 줄을 서서 기다려. 평풍초, 이밤나물, 으느리, 쩡어대가리, 간비제이, 명비제이, 부찌갱이, 모시찍구, 뱀이고사리는 삶아 놓으면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 캐도.”

우 할머니의 억센 나물타령은 끝이 없었다. 지금은 사람들 밥상에서 사라진 사자평 산나물. 우 할머니의 나물노래는 사자평 바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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