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 광풍으로 속살 파헤쳐진 함월산
천년고찰 백양사도 홍진의 내음 가득
아름다운 운치 보전 못한 무지 자괴감

▲ 이일걸 대한국제법학회 이사 한국간도학회 회장

타향살이를 하다 보니 함월산 백양사에 오랜만에 올랐다. 함월산을 개발한다고 떠들썩했던 때가 벌써 25년 전이다. 당시 여론은 울산의 주산인 함월산을 파헤친다고 부산을 떨었지만 정치권력 앞에 뾰쪽한 수가 없었다. 세월이 지나 백양사에 다시 오르니, 아름드리 노송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하여 상전벽해(桑田碧海)로 변했다.

천년 고찰의 아담한 대웅전 대신에 칠보단청의 우람찬 대웅보전이 나를 반기나 곧 마음이 불편해졌다. 산사의 청신한 기운이 아닌 홍진(紅塵)의 내음이 풍겼기 때문이다. 더구나 마당에 가득한 승용차는 오히려 속진(俗塵)의 매연을 내뿜고 있었다.

절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심신 수행의 청정도량이다. 새로 지은 일주문 현판은 ‘佛母山 白楊寺’(불모산 백양사)다. 현판과 양편 기둥의 글씨도 모두 인쇄체로 써 붙였다. 전국 사찰의 일주문 현판은 이름난 서예가들의 글씨다. 백양사를 울산의 성지라면서 일주문 현판조차 인쇄체라니…. 부속 건물의 현판 글씨도 월하스님 글씨와 산령사(山靈詞) 등 몇 개를 제외하고는 고졸하기보다 속기가 넘친다. 그리고 ‘함월산’이 아니고 왜 ‘불모산’인가. 함월산을 불모산이라 표기한 문헌 자료는 없다.

예로부터 백양사는 호국 염원의 도량이다. 백양사 주변 산들이 찢겨나가는 데 어찌 신령스러운 기운이 모일 리가 있겠는가. 호국불교의 상징인 백양사를 폐허가 되도록 방치한 울산 시민의 역사의식은 전혀 없단 말인가. 울산 구시가지를 조사한 김민수 교수의 결론은 “울산은 표백된 도시로 역사의 부스러기뿐이다”고 혹평했다. 37만평의 택지를 개발하면서 천년고찰 백양사의 아름다운 운치를 보전하지 못한 후손의 어리석음과 무지에 대해 자괴(自愧)할 뿐이다.

전국에는 바다나 강을 조망하기 좋은 절은 많지만 큰 강과 바다를 함께 조망할 수 있는 곳은 백양사가 유일하다. 동·남·북 세 방향에서 흘려오는 한강의 강물을 조망할 수 있는 운길산 ‘수종사’의 운치보다 백양사의 절경이 더 빼어났다. 이와 같은 백양사의 절경을 자손만대에 전하기는커녕 사사로운 욕심에 눈이 멀어 함월산을 파괴했으니 그 업보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이제 함월산의 나머지 녹지 85만평마저 깎아내어 혁신도시랍시고 고층아파트가 병풍처럼 들어섰다. 20년 넘게 공들인 ‘울산대공원’이나 ‘십리대숲’은 후손들이 언제나 만들 수 있지만 한번 파괴한 ‘함월산’과 ‘백양사’의 절경은 되살릴 길이 없음을 왜 몰랐을까. 백양사는 신라 말에 백양선사가 호국염원으로 창건한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연정, 설인, 보현스님에 의해 3차 중건되었으며, 함월산 개발 후 2005년에야 새롭게 단장했다. 고승인 경봉(鏡峰) 스님도 주지를 했다.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도 5년 간 백양사에서 요양했다. 이때 도산 안창호 선생도 심산을 병문안 차 백양사를 방문했다.

지금 함월산에는 울창한 소나무가 없다. 백양사에는 경봉스님처럼 큰 스님도 없고, 심산이나 도산 선생 같은 분도 찾아오지 않는다. 아아, 산은 높기 때문에 귀한 것이 아니고, 나무가 있어 귀한 것임을 다시 깨닫는다. ‘산이 높아서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선인이 살아야 유명해진다’(山不在高有僊則名)는 유우석의 누실명(陋室銘) 구절이 떠오른다.

아, 백양사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연약한 비구니로서 백양사를 재중창한 보현스님의 ‘보현대공덕비’만 쓸쓸히 외롭게 석양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일걸 대한국제법학회 이사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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