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산태극수태극 영남알프스 18경 - (16)재약산 층층골
가뭇없어라, 여덟 호박 줄무늬 표충사 산길
표충사는 여덟 봉우리가 연꽃마냥 에워싸인 호국성지이다. 이 여덟 봉우리 꼭짓점엘 올라가 본 사람이라면 표충사가 천하명당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고산중봉에 가려진 길지(吉地)이고, 그 골골산산에는 명수(明水)가 흐른다. 가뭇없는 여덟 봉우리를 떠받든 실타래 산길은 둥근호박 줄무늬처럼 연결되어 있는데, 결코 어느 구석 하나 쉬운 길이란 없다.
탐방대는 여덟 호박 줄무늬 산길들을 구석구석 뒤졌다. 하늘을 찌르는 산봉우리를 오르고, 재를 넘고 강을 건너길 여러 차례. 드넓은 사자평의 만경창파를 담기 위해 십리 떨어진 향로산 꼭짓점에 올라서기도 하였다. 멀찍이서 바라본 재약산 층층골은 사자평에서 발원한 시원한 물줄기가 폭포층을 이루고 있었고, 사자평은 억새나라였다.
먼바다에서 생산된 소금 팔러다닌
요즘 연예인급 소금장수 오가던 길
약초와 비경이 숨은 재약산 층층골
무단 채취로 약초없이 비경만 남아
재약산 층층골에는 두 갈래 실타래 산길이 있다. 표충사 대밭 뒤로 난 화전길과 층층계곡을 타야 하는 계곡길이다. 험악하기 짝이 없는 층층골을 찾아나선 날은 일찍 찾아온 폭염으로 산길은 오뉴월 엿가락마냥 누글누글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탐방대가 초입인 표충사 부도탑을 휘돌자 경내를 감싼 대밭이 길게 이어졌다.
표충사 대밭에서 사자평으로 이어진 이 코스는 익숙한 길이었다. 우거진 소나무가 무시로 술내음을 내품어 살방살방 걷기에도 좋았다. 탐방대는 이 길을 걸으면서 사자평을 드나들었던 화전민들의 애환을 먼저 이야기했다. 표충사와 통도사를 오가던 스님, 소를 몰고 가는 채꾼, 무거운 소금가마니를 진 소금장수, 서로 티격태격 거리던 밀양장꾼과 언양장꾼들 이야기도 나왔다. 울산 앞바다에서 구워진 자염을 지게짐한 소금장수는 이 길을 통해 아불장, 밀양장으로 나갔을 것이다.
기러기처럼 떠돌던 장꾼들의 통로, 표충사 대밭길
부평초처럼 떠도는 이들의 행로는 가시밭길이었다. 화적떼와 맹수가 설치는 층층골을 넘을 때는 여러 사람들이 행로를 함께 했다. 지리에 밝고 심지가 굳은 두령짜리를 필두로 장꾼들과 도부꾼, 드난꾼, 대소쿠리에 건어물을 인 여부상(女負商)도 있었다. 죽기살기로 사자평에 오른 그들은 화전민이 거처하는 골방 신세를 졌다. 모두가 사람대접 제대로 못받은 사람들이었다.
표충사 대밭길을 연 탐방대는 먼저 길에 전해오는 ‘소금쟁이 새미’를 찾아보기로 했다. 이미 오래 전에 소금장수가 사라진 작금에 소금쟁이 새미가 남아있을까 하는 묘한 설렘이 들었다. 탐방대가 찾아낸 소금쟁이 새미는 두 군데였는데, 시원한 물을 쏟아내는 샘터는 아니었다. 표충사 대밭에 있는 새미는 찬물 한 바가지 고여 있을 정도였고, 사자평을 오르는 벼랑 바위틈에서 발견한 바위샘 물은 그저 목을 축일 정도였다. 외진 바위샘에는 전대를 빼앗은 화적떼들이 소금장수를 층층계곡 아래로 떨어트려 죽게 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온다. 소금쟁이 새미는 전국 여러 곳에 있다. 소금쟁이 새미 중에는 지리산 뱀사골의 ‘간장소’가 유명하다. 지리산 장터목과 소백산 외씨버선길 그리고 가지산 석남재도 소금고개이다. 먼 바다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지게 짐하고 골골산산 팔려 다닌 소금장수들의 애환이 사무친 고개들이다.
소금장수는 요즘으로 치면 연예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마을을 다니며 아낙들을 불러모아야 했다. ‘소금 사소! 소금 안 사는교?’ 사자평마을에는 흥이 많은 소리꾼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금장수는 소리꾼에게 소금 한 바가지를 주고 소리를 청해 들었다.
층층만층 구만층 사자평 지랄 날라리
층만층 구만산 넘어넘어 구천리라
구만층 구만산 구만구천 계단이로다
숲의 장막을 빠져나온 탐방대는 양지 바른 대평원에 들어갔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았던 사자평마을은 텅 비어 있었고, 고사리분교는 빈터로 남아 있었다. 지난해 복원사업이 마무리 된 사자평 산들습지는 동네공원처럼 조성해 놓아 쉬 눈길이 가질 않았다.
예전의 사자평은 화전민들의 터전이었다. 사자평에 화전민이 모여들기 시작한 시기는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였다. 가까운 밀양 단장면 사람들이 먼저 올랐고, 이어서 배내골 사람들이, 나중엔 어중이떠중이까지 다 모여들었다. 오갈 데 없는 그들은 무주공산 사자평원에 감자 농사를 짓고 염소를 키웠다. 비료가 귀한 고산지대라 농작물을 수확하기 위해선 사자바위 뒤에서 불을 놓았다. 타고 난 사자평 억새는 이듬해 거름이 되어 일등 고사리와 감자를 안겼다.
무릉도원인가, 사람 잡는 길인가,
재약산 층층골
고사리분교 일대를 돌아본 탐방대는 서둘러 층층계곡을 따라 사자평을 빠져나갔다. 문제는 층층계곡길은 사람 잡는 험로였다. 예컨대 길을 인간으로 비교하자면 표충사 대밭길은 화전민, 층층계곡 길은 정이 싹 가시는 화적떼였다. 코가 땅에 닿는 가파른 경사길, 위험천만인 자드락길, 구불구불하고 아슬아슬한 벼랑길은 피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층층폭포와 홍룡폭포의 장대한 물줄기 앞에서는 힘든 여정이 말끔히 가셔졌다.
골이 깊은 재약산 층층골은 구석구석 귀한 약초들과 비경들이 숨어 있는 골짝이다. 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재약산(載藥山)은 약초와 인연이 깊은 산이다. 신라 흥덕왕 셋째 아들이 병을 얻어 전국 명산과 약수터를 두루 찾아 헤매다가 이곳 사자평에서 영정약수(靈井藥水)를 먹고 병을 치료해 그 자리에 영정사(靈井寺)를 세우고, ‘약이 실린 산’이라 하여 재약산으로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울타리 없는 사자평에 약초를 심었던 약재상은 자연산 약초인 줄 알고 채취해 가는 산행객들 때문에 재배를 포기했다.
하산을 마친 탐방대는 사자평 화전민을 찾아 표충사 앞마을을 수소문했다. 어렵사리 만난 노파는 땡볕 아래에서 감자밭을 일구고 있었다. 청춘을 사자평에 바친 노파는 화장품(일명 동동구리미) 한 번 바르지 않았어도 피부는 고왔다. 그녀가 먹고 살기 위해 남편과 함께 사자평에 오른 해는 1957년이었다. 두 손이 갈고리가 되도록 화전을 일구었다. 차츰 등산객이 늘어나자 두부를 만들어 팔았다. 그러나 사자평 강제철거로 끝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1994년 쫓겨난 기구한 이력을 가진 화전민이었다.
“사자평 살던 때 생각하면 몸서리난다. 너무 외로워 개를 친구 삼았다.” 노파는 고립무원에 떨어진 사자평의 외로움부터 떠올렸다. “감자가 좋아. 사자평 감자 종자를 구하러 멀리서 올라오더라. 당근은 장단지만 하고, 감자는 아이 대가리만 하지.” 영근 감자와 당근은 이고 지고 밀양장, 아불장, 팔풍장, 멀리 언양장에 내다 팔았다. 죽기살기로 걸어도 하루만에 오갈 수 없는 길이었다.
김장철이면 그녀의 남편과 함께 소금가마니를 져 날랐다. 소금 없으면 백김치를 먹어야 했다. 남편이 언양장을 다녀오는 날이면 귀한 갈치를 들고 왔다. “나물만 먹고 사는 사자평 촌놈들에게 언양 갈치는 최고지”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갈치 자랑을 했다. 맷돌에 갈아 만든 손두부에 곁들인 동김치 국물은 감기를 한 방에 뚝 떨어지게 했다.
“발전기 호롱불은 양반이야. 전기가 안 들어오니 초를 지고 층층골을 올랐지. 초가 든 망태기 지고 올라가면 얼마나 무거운지 발이 안 떨어져. 문풍지 접시에 잡기름 섞은 산유자 기름 해서 불 밝히고 길쌈 삼고, 밤새 베틀 짜.” 사자평에 소를 맡긴 소 주인이 그 삯으로 소금을 지고 왔다. 소를 맡기러 온 소 주인은 허리까지 차는 억새 밭길을 지나기 힘들어 했지만 시원한 바람이 부는 사자평에 오른 소는 싱긋이 웃었다.
*영남알프스학교 다음 산행 5월28일(토) 얼음골 호박소 물길 따라, 문의 010·3454·78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