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창호 극작가

“신라의 태대각간 최유덕. 살던 집을 기부하여 지은 절이 유덕사. 그의 먼 후손인 최언위가 유덕의 초상을 이 절에 모시고 비석도 세웠다.” 유덕사에 대해 삼국유사에 나오는 기록의 전부란다. 이 절에 있던 석조여래좌상은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4호. 지금 청와대 뒷산에 있어. 눈꼬리를 살짝 치켜뜬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석굴암 본존불같이 잘생긴 석불로 경주 남산 옛 절터에 있었지.

1912년,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가 수행원들과 토함산에 올랐겠다.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가 만난 석굴암 불상이 진짜 멋지거든. 탐이 났지만 불상이 너무 커서 마음을 돌렸지. 다음 코스는 니나노 술집. 그 다음날 데라우치는 시모노세키로 갔지. 총독은 곧 거기 있는 조선군청으로 들어갔어. 청사에서 묵으면서 늦도록 마신 다음 취중 순시를 하다 보니 눈에 띄는 불상이 있거든. 경주금융조합 고히라 이사가 지닌 거였어. 완전 미남인데. 이 불상, 어디 있던 거요? 총독이 눈독 들인 걸 알아채고 고히라가 재빨리 불상을 총독부 관저로 옮겼어. 돌부처를 뇌물로 상납한 게야. 우리 보물이 총독의 위세에 눌려 거기 있게 된 이유지.

데라우치의 고향은 울산시와 자매결연을 한 하기시(萩市)란다. 그때 빼앗은 우리 미술품들은 야마구치 현립 단기여자대학 도서관에 전시되어 있지. 해방이 되자 총독관저는 경무대가 되고, 경무대는 청와대가 되었어. 한 번 발목 잡힌 불상은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거야. 1994년부터 큰 사고가 잇따라 터졌지. 구포역에서 열차가 뒤집어지고, 서해페리호가 침몰되고,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충주호 유람선에 불이 나 사람들이 많이 죽었지. 삼풍백화점까지 무너졌어. 대통령은 그때마다 고개 숙여 사과를 했는데, 청와대에서 불상을 치워서 그렇다는 소문이 돌았어. 알아보니 대통령 관저를 새로 지으면서 원래 자리에서 백스무 걸음쯤 옮긴 지라 유언비어임이 밝혀졌지.

한때 매일신보에서 이 석조여래좌상을 ‘미남석불’이라고 헤드라인을 뽑은 적도 있어. 통일신라 때의 이상적인 모습과 조화로운 비례를 갖춘 이 불상의 얼굴은 지금 엉망이 되고 말았어.

장창호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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