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고빈정 물회

▲ 살얼음 육수에 버무려져 막 상에 오른 고빈정 물회.

20여년 잘 다니던 대기업 그만두고
대형횟집 차려 한순간에 큰돈만 잃어
육수·양념 비법 찾아 전국으로 떠돌아
감칠맛 나는 야채육수에 톡 쏘는 양념장
물회 하나만으로도 ‘줄서는 집’ 명성 얻어

더운 날씨에는 시원한 음식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냉면, 빙수도 좋지만 한 끼 식사로 거뜬하면서도 복잡한 머릿속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물회를 빼놓을 수 없다.

물회는 어부의 애환이 촘촘히 박힌 음식이다. 고된 노동을 마친 어부들이 주린 배를 채우려고 잡고 남은 생선에 장을 넣어 쓱쓱 비비고 맹물과 밥을 넣어 먹은 한 끼 식사였다. 점심나절이면 밥은 차갑게 식었다. 딱히 돈을 받고 파는 음식이 아니라 집에서 손쉽게 만들어 먹은 가정식이었다. 뱃사람들의 거칠고 투박한 음식이 이제는 냉면만큼이나 여름을 대표하는 먹을거리로 인기를 끌게 된 셈이다.

물회 전문 고빈정은 울산 남구청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공공청사와 사무공간이 밀집한 지역에서 식당 간판을 한 눈에 찾기가 쉽지 않다. 골목을 한번 돌아 아담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들어갈 수 있다.

▲ 최상일 고빈정 대표가 물회를 만드는 비법을 소개하고 있다.

고빈정에서 물회를 주문하면 큼직한 대접에 담겨져 나온다. 참가자미, 광어, 우럭 등 씹을수록 고소한 한입 크기 횟감들이 살얼음과 같은 빙(氷)육수에 올려져있다. ‘물회’ 하면 떠오르게 마련인 국물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얼음 속에 박혀진 오이채, 다진 파와 김가루만 올려져 있을 뿐 별다른 고명은 발견할 수 없다.

횟감에 묻힐 정도의 양념장만 젓가락으로 적당히 버무린 뒤 먹는다. ‘물기 없는 물회’는 쌈으로도 싸 먹을 수 있다. 시원한 바다 향과 매콤달콤새콤한 양념장이 입안으로 퍼진다. 아삭한 야채의 식감이 곁들여져 한 입 가득 오랫동안 싱싱한 맛을 음미할 수 있다.

최상일 고빈정 대표는 “우리 물회는 비벼 먹는 것”이라며 “쌈으로 먹다보면 살얼음이 녹게 되고, 그 이후에 국수나 밥을 말아 식사가 되도록 먹으면 된다”고 말했다. 이어 “대부분의 유명 물횟집이 다 그렇겠지만, 우리 집만의 비결 또한 수년간의 실험과정을 거쳐 터득한 ‘나’만의 육수와 양념장 레시피에 있다”고 했다. 양념장에 대해서는 전국에서 택배로 주문을 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며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최 대표는 지금의 육수를 만들기까지 내다버린 재료값만 해도 부지기수라고 했다. 그래도 아깝지는 않다. 이제는 그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육수 맛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야채만을 사용하는 고빈정의 육수는 시원하게 감기는 감칠맛이 압권이다. 깊은 맛을 남기는 고기육수도 시도는 해 봤다. 하지만 물맛이 텁텁해지면서 회 맛까지 떨어뜨려 일찌감치 접었다.

육수 보다 더 공을 들인 건 양념장이다. 최 대표는 양념장 비법을 찾아 전국의 유명식당이라는 곳은 서울과 포항, 서해바다까지 모두 섭렵했다. 톡 쏘는 물회 양념장의 비결이 사실은 뚜껑만 따서 바로 붓는 사이다 맛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고빈정에서는 사이다를 절대로 넣지 않는다고 한다. 그 만의 비결은 재료의 배합과 숙성의 정도에 있다. 온갖 재료를 섞게 되는 여느 양념장과 달리 그는 고추장과 레몬과 매실을 대표로 한 대여섯 가지 재료만으로 맛을 낸다.

 

최 대표는 “어느 것 한 가지라도 분량이 많거나 적으면 안된다. 보름이냐, 한 달이냐, 아니면 석 달이냐…. 숙성 기간에 따라 양념장의 점성과 맛이 달라진다. 그렇게 찾아 낸 최고의 맛을 진맛이라고 하는데, 우리 집의 진 맛은 그냥 양념장이 아니라 발효를 거친 건강식이라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물회를 주 메뉴로 줄서는 집이 되기까지, 최 대표가 치른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20여년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 둔 뒤 남구 삼산동에 대형횟집(초장집)을 개업했을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직접 주방에서 횟감을 뜨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주방장 6명을 포함해 스무 명에 가까운 최초의 기업형 식당은 그에게 잠깐 동안 큰돈을 만지게 해 줬다. 하지만 세금폭탄, 원가상승, 경쟁식당과의 치열한 접전에다 종업원들과의 기싸움 등으로 한 순간에 큰돈을 잃게도 만들었다.

최 대표는 “회를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 수십 년간 식당일을 하면서, 이제는 고기머리를 친 뒤 입으로 껍질을 벗기는 단계에 왔다”며 “그 동안의 이야기는 말로 다 못해서 한 권의 책으로 남길까 싶다”고도 했다.

고빈정은 각종 포털사이트의 맛집 블로거들에게도 이미 유명하다. 이에 따라 주변의 공무원들만큼이나 전국에서 몰려오는 20~30대 젊은 층의 방문도 적지 않다. 그 중에는 그의 비결을 익히고 배워 식당을 해 보겠다는 젊은이도 있다. 하지만 최 대표는 “단순히 배워서 할 수 있는 식당이라면 안하는 게 낫다”며 “배우는 것 이상으로 공부해서 스스로의 비법을 만들어야 살아남는 식당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물회 1만2000~2만원. 지리탕 2만3000~2만5000원.

글=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사진=임규동기자 photolim@ksilbo.co.kr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