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창화 문화도시 울산포럼 고문

1862년 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얘기다. 북군 어느 부대의 중대장이었던 엘리콤 대위는 어둠이 내린 전장 부근 숲속에서 한 병사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엘리콤 대위는 위생병을 불러 그 병사를 치료하게 하지만 결국은 부상 당한 병사는 죽고 말았다. 죽은 병사는 적군인 남군의 병사였다. 엘리콤 대위는 랜턴으로 죽은 병사의 얼굴을 비추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병사는 바로 자신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엘리콤 대위의 아들은 음악도였고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남군에 지원해 입대한 것이다. 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이란 말인가. 엘리콤 대위는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다가 아들의 군복 주머니에서 구겨진 악보 한 장을 발견했다. 아들이 작곡한 트럼펫 독주곡이었다. 엘리콤 대위는 사령관에게 아들의 장례를 청해 허락 받았다. 그리고 하나 더 청했다. 아들의 음악을 연주할 군악대를 지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령관은 그 청은 거절하고 대신 나팔수 한 사람만 지원했다. 나팔수는 엘리콤 대위의 아들이 작곡한 음악을 장례식에서 연주했다. 이 곡이 바로 진혼곡 ‘Taps’다. 엘리콤 대위의 아들은 자신의 장례식에 연주될 진혼곡을 작곡한 셈이다.

얼마 전 오랜 친구로부터 한 통의 메시지를 받았다. 그 친구가 보내준 메시지에 이 진혼곡이 담겨 있었다. 나는 친구가 보내 준 이 음악을 들으면서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66년 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학도병으로 참전해 쏟아지는 포탄을 헤치며 전장을 누비던 그 절체절명의 순간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17세의 나이에 고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여름방학을 맞은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가 느닷없이 국군의 모병 트럭에 올라타게 됐다. 그 후 부모님에게 소식 한 통 전하지 못하고 곧바로 전장에 투입돼 포항전투, 영천전투, 청천강 전투를 겪으며 거침없이 북진했다.

그 사이 나는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겪었다. 아침밥까지 함께 먹었던 어린 전우들은 쏟아지는 총탄을 맞고 바로 내 옆에서 쓰려졌다. 북한군의 집중 사격을 뚫고 강을 건너다가 귀 옆으로 날아가는 실탄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으며 적이 쏜 총에 맞아 강 한복판에서 둥둥 떠내려가던 친구들을 목 놓아 불렀다.

평안북도 개천에 이르러 이제 곧 60리 밖의 압록강물을 마시게 됐다며 좋아하던 우리는 간밤 느닷없는 퇴각명령으로 희천 땅을 밟지 못하고 혼비백산 후퇴했다. 각개 후퇴를 하던 나는 어두운 밤 생전에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낯선 산과 계곡을 떠돌며 배고픔과 추위를 견뎠다.

살아남은 것은 운명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학도병들이 죽음으로 이 나라는 지켜졌다. 대한민국 현대사에 가장 비극적이었던 전쟁의 한 복판을 건너온 나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거듭하는 조국의 역사를 함께 걸어왔다. 이제 그 엄혹한 전장에서 함께 살아남았던 전우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외롭게 시대의 증인으로 남아 있다.

친구가 보내온 진혼곡을 다시 듣는다. 역사는 흘러갔지만 아픈 상처는 남았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시 그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전쟁에서 나라를 지켰던 선혈들의 넋을 위로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을 영원히 잊지 않아야 한다. 애를 끊어내는 듯한 진혼곡이 울려 퍼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정창화 문화도시 울산포럼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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