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앞길 열어준 가자미

 

내 엄마 황옥선 여사는 펄떡이는 가자미를 오른손으로 잡았다. 재빠르게 가자미 대가리 아랫부분의 신경을 절단하고 방혈시켰다. 수초 만에 가자미의 힘찬 꼬리 짓이 멈춘다. 단칼에 숨을 멈춘 가자미가 내 앞에 놓였다. 나는 때를 벗기듯 재빠르게 비늘을 쳤다. 말쑥해진 가자미는 다시 엄마 앞에 놓였다.

“세꼬시로 잘 썰어주이소. 근데 아지매 고기는 꿀 발랐는교. 와 같은 고기라도 아지매가 썰어주는 회는 구시하고 입에 착 감기는요.” 엄마의 차별화된 칼질은 시간 속에서 익어가던 가난을 밀어냈다. 그리고 다섯 형제 중에서 맏이, 그것도 아들이 아닌 딸을 대학에 보냈다는 자부심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대학생 딸이 호사였던 그 시절
가장 흔한 생선이면서도
생명의 자양분 가자미처럼
아버지는 거친 바다에 나가
목숨을 담보로 고기 잡고
엄마는 회떠서 등록금 마련해

아버지는 물고기 길목을 잘 알았다. 바다 풍수에 밝았다고나 할까. 이런 아버지는 내가 대학 가는 것을 반대했다. 바다에 그물을 풀면서 그물과 함께 바다에 빠져죽을 뻔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목숨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넷째, 다섯째인 아들들의 앞날을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고단한 삶의 파편들이 잘 벗겨지지 않는 고기비늘처럼 아버지에게 달라붙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바다에서 온전히 주인이었다. 가자미 무게로 배가 출렁거렸다. 아버지는 가자미를 잡은 것이 아니라 쓸어 담아왔다. 내 대학 입학 등록금 70여만 원이 한방에 해결됐다.

예부터 가자미는 가장 흔한 생선이었다. 그 때문인지 옛날 한반도의 별칭은 ‘가자미의 땅’이라는 뜻인 접역(鰈域)이었다. 흔히 알고 있는 우리나라의 별칭 ‘조선(朝鮮)’ ‘계림(鷄林)’ ‘청구(靑邱)’ ‘근역(槿域)’과 비교해서 품격이 좀 떨어져 보인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우리 조상들은 가자미 땅이라는 별칭을 자랑스럽게 여긴 듯하다. 조선 초, 세조는 명나라와 외교문서에서 스스로 우리 땅을 접역이라고 불렀고 조선 후기 정조 역시 ‘우리나라는 접역으로 예의를 아는 곳’이라고 했다.

가자미는 넙치와 눈의 위치로 구분한다. ‘우가자미 좌넙치’ 또는 ‘좌광(넙치, 광어), 우도(가자미, 도다리)’로 외면 구분이 쉽다. 가자미는 쫄깃한 식감을 가진 흰살 생선으로, 초밥용이나 횟감으로 많이 이용된다. 저지방, 고단백, 저칼로리 식품으로 꼽히는 참가자미는 기력 보충에 좋아 특히 환자나 노약자에게 도움이 된다. <동의보감>에도 “참가자미는 그 맛이 달큰하고 독이 없으며, 허약한 것을 보강하고 기력을 북돋우며 양기를 움직이게 한다”고 기록돼 있다.

용연 버스종점에는 10여 곳의 노점 회 가판대가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시설이라곤 천막을 지붕 삼아 햇볕을 가린 것이 다였다. 주말에는 많은 사람이 가슴마다 사연을 안고 활어를 맛보기 위해 왔다. 엄마의 사주팔자에 식복이 많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항상 손님들로 북적였다. 그래서 나는 주말이면 엄마 뒤편에 자리를 틀어야했다. 아버지가 온전히 실력을 발휘한 날에는 나도 딱 그만큼 더 고기비늘을 벗겨 내야했다.

▲ 박미애 울산공업고등학교 영양교사

엄마는 문맹자였다. 하지만 놀라운 기억력과 암산의 소유자였다. 손님 중에는 막노동 일꾼들도 많았다. 엄마는 돈 없는 사람에게는 외상으로 회를 줬다. 어떨 때는 돈을 받지 않고 그냥 주기도 했다. 문전성시는 엄마의 식복 많은 사주팔자 덕분만은 아닌 것 같았다.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온 엄마는 뇌리에 보석처럼 박아둔 기억을 쏟아냈다. 외상장부에는 오직 엄마만이 아는 비밀스런 이름으로 가득했다. 예컨대 ‘김씨 아저씨 친구 머리 벗겨진 사람 20,000원’ ‘앞집 새댁이 친구 꽃가라 치마 잘 입는 여자 15,000원’ 이런 식이었다.

외상장부의 비밀스런 이름은 돈을 지불받은 대가로 두 줄 그어졌다. 그러나 끝내 두 줄을 받지 못한 이름에 대해 엄마는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않았다. 두 줄 그어지지 않은 이름을 두 줄 긋는 것을 염주 삼아 엄마의 기도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대자연 앞에는 늘 간절한 기도가 있었다. 용왕 신께 제사를 올렸다. 물고기 많이 잡게 해달라고. 목숨 좀 지켜주시라고. 참으로 숱한 사연을 맨 몸으로 받으며 견뎌온 엄마, 아버지. 모든 생명이 시작된 곳은 짙푸른 바다 속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생명의 잉태자요 전달자는 당신들이었다.

박미애 울산공업고등학교 영양교사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