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백두대간 제19구간이화령~희양산~버리미기재)-거리 17.6㎞, 시간 10시간40분

▲ 구왕봉(九王峰)은 희양산(曦陽山)을 넋 놓고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구왕봉 오름에서 뒤돌아본 희양산은 옅은 안개 속에 잘 그려놓은 수묵화처럼 펼쳐져 있다.

산에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산행을 앞두고 기상청에서 발표하는 산악 날씨를 반드시 확인한다.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바람의 세기는 얼마나 되는지, 산행을 진행하는 동안 기온은 어떻게 변하는지….

기상청 예보에 따라 산행시 입을 옷 선택을 달리하고 일기에 맞춰 당일에 필요한 생명수와 장비를 준비한다. 선두에서 리드를 하는 대장은 기상예보를 참고해서 거리 대비 진행속도를 조절하고 대원들이 체력 안배를 할 수 있도록 산행을 운영한다. 그런데 이번 19구간 산행에서는 사전에 파악한 기상정보와 다소간 차이가 있어 조금 당황스러웠다. 산행 시작 시점에서는 구름이 많다가 차츰 개고 산행 종료가 예상되는 오후 4시께부터 눈 또는 비가 올 것이라고 예보돼 있었다. 그러나 낮 12시 무렵 지름티재를 지나 구왕봉에서 식사를 하는 중에 예보보다 훨씬 앞서 눈이 쏟아져 내렸다. 바람과 안개를 동반한 눈이 몰아치기 시작하니 오후 4시께면 끝날 줄 알았던 산행은 예정된 시각을 넘겨 겨울 짧은 해가 진 뒤에야 마무리가 되었다. 물론 겨울 산행 시에는 악천후를 대비해서 복장과 장비를 준비하기는 하지만 일기예보만 믿고 방심했다가는 폭설 속에 참으로 힘든 산행이 될 뻔 했다.

한폭의 그림처럼 솟아 있는 희양산
스님들 수행 위해 정상길 막혔지만
세월의 자비인듯 지름티재 길열려
백두대간 종주자들이 희양산 품에

오전 3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각에 이화령 휴게소에 버스가 도착했다. 백두대간을 가르는 요충지이자 한반도의 중앙과 영남지방 간, 온갖 문물이 왕래하던 이화령은 밤의 정적 속에 잠겨있고 생태보전 차원에서 절개지를 복원해놓은 터널 안, 바람의 통로에도 바람기 없이 포근하기만 하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여유 있게 산행 준비를 하고 어둠 속 산길로 접어든다.

▲ 구왕봉에 들어 중식을 먹는 중에 눈이 펄펄 날리기 시작했다. 눈은 순식간에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을 덮었다.

이화령이 해발 548m, 첫 봉우리 조봉은 673m, 그 다음 황학산 912m, 오늘 산행지 중 가장 높은 백화산이 1063m로 이화령에서 백화산에 이르는 약 7.5㎞의 산길은 큰 부침 없이 완만하고 좋은 편이다. 백두대간이 소백산 구간을 벗어나 월악산 구간으로 접어들어서 이어지는 속리산 구간이 끝나도록 곳곳의 산들은 암릉(巖陵)과 암봉(巖峰)으로 되어 있다. 산세가 아름답고 조망이 빼어난 곳이긴 하나 로프에 의지해야 하는 구간이 많고 오르고 내림이 심해 이 구간 산행 시 체력소모가 크고 위험요소가 많다. 때문에 안전산행이 각별히 요구되는 지형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중에 이화령에서 백화산까지의 등로는 어두운 밤에도 별 어려움 없이 열어갈 수 있는, 비교적 편안한 산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 희양산에서 지름티재로 내려서는 약 200m 직벽 구간은 응달진 곳이라 겨울 산행 때는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곳이다.

백화산에서 이만봉으로 이동 중에 하늘이 잔뜩 찌푸린 상태로 날이 밝았다. 오늘 대간 능선은 전체적으로는 동쪽에서 서남진하는 형태이면서 부분적으로는 영남의 문경 마성면 지역으로 자루 모양처럼 내밀었다가 다시 마루금의 북쪽인 충북 괴산 연풍면 방향으로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연속 S자 코스 지형이다. 맑은 날이면 북쪽의 월악 영봉을 비롯한 국립공원 월악지역의 산군들이 가늠이 되고 남쪽으로 속리산 국립공원 지역의 산군들이 그리 멀지않은 곳에 도열해 있는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행을 시작해 5시간을 걸었어도 산행 들머리 이화령이 계곡 건너편에 있고 아직도 두 시간여를 더 가야 도착할 수 있는 희양산이 바로 코앞에 있다. 곰틀봉 단애(斷崖)에 서니 협곡을 가운데 두고 지나온 백화산과 가야할 희양산이 한 폭의 그림처럼 양쪽으로 펼쳐져있다.

희양산(해발 999m)은 신라 헌강왕 5년(서기 879년)에 창건한 봉암사를 품고 있다. 거대한 암봉이 솟구친 희양산은 수려한 풍광과 함께 명산 반열에 아니 오를 수 없는 산이지만 1982년부터 봉암사는 물론 희양산 정상을 비롯해 주변 산군까지 일반인 출입을 통제하면서 산꾼들에게 더 회자된 산이기도 하다.

 

1947년 현대불교사에 큰 업적을 남긴 성철, 청담 스님 외에도 뜻을 같이한 여러 스님들이 부처님의 뜻대로 수행을 하자는 이른바 봉암결사(鳳巖結社)에 돌입했다. 이후 치열한 사찰 정풍운동을 전개하면서 한국 현대불교사에 근간이 되었던 봉암사는 일체의 외부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스님들이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산문을 폐쇄했다. 또한 봉암사와 연계되는 일체의 통로를 모두 차단하게 되었다.

괴산 연풍 은티마을에서 지름티재를 넘어 봉암용곡(鳳巖龍谷)을 통해 봉암사로 가는 길은 문경 가은면에서 도로를 따라 정상적으로 갈 수 있는 길 외에는 가장 손쉽게 봉암사로 접근할 수 있는 루트였다. 그러나 병목과 같은 지름티재 안부에 막사까지 세워놓고 스님들이 당번제로 길을 막고 섰으니 봉암사는 물론 희양산으로도 갈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백화산에서 이만봉을 통해 희양산으로 드는 반대편 경로 또한 희양산성이 끝나는 지점에서 지름티재로 내려서는 갈림길에 스님들이 지키고 섰다. 그러다 보니 스님들과 백두대간 종주자들 간의 마찰이 끊임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백두대간 전 구간을 걸어보려는 산꾼들에게는 쉽게 지나갈 수 없는 악명 높은 구간으로 각인되게 된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봉암사의 정신을 세인(世人)들도 이제는 이해를 하고 정숙 산행을 해서일까. 아니면 부처님의 자비심이 산을 산꾼들에게 내어주게 하신 걸까. 지름티재를 지키던 초막도, 스님도 볼 수가 없고 정상에는 백두대간 표시가 있는 정상석도 올려져있다. 부처님의 가피로 죄 많은 중생이 희양산에 들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가야할 길도 놓아버린 채 넉넉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희양산을 쓸어안아 본다.

희양산에서 지름티재로 내려서는 약 200m의 직벽구간은 응달진 곳이라 특히 겨울 산행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곳이다. 직벽 곳곳이 빙벽이 되어 있었다. 지름티재에서 봉암사로 갈 수 있는 봉암용곡 입구는 아직도 나무 울타리를 엮어 세워서 봉암사 출입을 막고 있다. 병목 같은 지름티재에 내려섰다가 구왕봉 오름에서 뒤돌아본 희양산은 옅은 안개 속에 잘 그려놓은 수묵화처럼 펼쳐져 있다. 구왕봉은 희양산을 넋 놓고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하는 산…. 구왕봉에 들어서 중식을 먹는 중에 흰 눈이 펄펄 날리기 시작한다.

구왕봉에서 날머리 버리미기재까지 남은 거리가 약 12㎞. 맑은 날이면 백두대간에서 500m정도 떨어져 있는 괴산의 명산 악희봉도 들러보고 거리에 대한 부담보다는 유유자적하고 싶은 구간. 참 볼거리가 많은 지역인데 눈과 더불어 안개가 앞을 가린다. 중식을 먹는둥마는둥 하고 일어서는데 가야할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펑펑 쏟아져 내리는 눈은 순식간에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을 덮어버린다. 자칫 앞사람과의 간격이 벌어지면 앞서간 사람의 흔적을 놓쳐 갈림길이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눈이 내리는 중에도 다행스러웠던 것은 날씨가 포근해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가 있었다. 내리는 눈은 다시 올 날을 기다리며 스스로를 비워낸 앙상한 나목을 포근히 덮어주었다. 먼 산길에 지친 산꾼의 늘어진 어깨도 위로처럼 덮어주고 아프고 메마른 영혼의 가슴에도 하얗게 하얗게 내린다. 추워야만 내리는 눈이 오히려 이 겨울에 춥지 말라고, 외롭지 말라고 축복처럼 소복소복 내린다. 대원들은 힘든 중에도 기쁘게 눈을 맞으며 산길을 이어갔다.

▲ 김두일 대한백리산악회 고문

산행지로 오면서 내심 산행 날머리에 내려설 즈음에는 백설이 분분했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있기는 했었다. 원만한 산행과 안전을 위해서는 하지 말아야 할 바람이었으나 예정된 시각에 안전하게 하산할 수 있고 대원들 몸 상태가 정상적인 것을 전제로 한 기대였다.

좋았다. 힘들고 고통스럽게 눈바람을 뚫고 산길을 이어가고 있는 대원들이 염려되고 안타까운 마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온 산천을 하얗게 덮어주며 내리는 눈이 그저 좋았다. 여름날, 몸이 따갑도록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산행을 할 때의 그 느낌처럼…. “이것이 산이다.”

김두일 대한백리산악회 고문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