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에 대한 성찰은 ‘법관의 양심’
자신과 상대방에 대한 성찰 시간 가지고
조정자로 가교역할 하면 국민 신뢰 회복

▲ 이종엽 울산지방법원 부장판사

마사 누스바움은 그의 책 ‘시적 정의’(Poetic Justice)에서 훌륭한 재판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타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재판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삶’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심판 앞에 놓여진 타인의 삶에 대한 상상력 없이는 법적 기교와 형식에 불과하다. 우리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하여 법관의 타인의 삶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법관의 양심’이라고 표현한다.

그 타인은 피해를 가한 가해자(혹은 피고나 피고인)일 수도, 동시에 피해를 당한 피해자(혹은 원고나 고소인)일 수도 있다. 법관은 대립되는 그 양쪽의 중간쯤에 서서 분쟁하는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당면한 각각의 상황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상상함으로써’ 전체적인 사건의 실체를 인식하고, 그 전에는 소통할 수 없었던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가교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 성찰을 통해 상습절도와 도주범인 ‘장발장’은 개별화된 독립한 인격으로서 법정형과 양형기준에 의해 단죄되는 얼굴 없는 범죄자가 아니라,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나와 같은’ 한 인간으로서의 타인이 된다.

나와 상대방에 대한 성찰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심지어 나의 가해자였던 그 상대방과 ‘화해’할 수 있다. 애덤 모턴이 그의 명저 ‘잔혹함에 대하여’(Thinking in Action: On Evil)에서 지적한 것처럼 용서와 화해는 다르다. 우리는 어떤 ‘행위’를 용서할 수 없지만, 그 행위를 한 ‘사람’과 화해할 수는 있다. ‘화해’란 당신의 행위 자체는 용서할 수 없을지라도 당신이 나와 같은 유한(有限)한 인간으로서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아래 그를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민사재판에서는 조정이나 화해도 가능하게 되고, 형사재판에서는 피고인에 대하여 죄를 인정하되, 그 형의 집행을 유예하여 ‘갱생’의 기회를 줄 수 있게 된다. 그 갱생(更生) 즉 ‘다시 태어남’이란 바로 행위의 잘못을 인정하되, 다시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으리라는 인격의 각성에 대한 법의 믿음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생각하기에 재판은 법관에게도 또 재판의 당사자에게도 하나의 응집된 성찰의 과정이다. 그리고 그 성찰에는 어느 정도의 긴 시간과 나와 반대되는 자의 삶마저도 마음에 품을 여유가 필요하다.

재판이 필자가 임관하였던 15년 전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숙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 재판이 과연 그러한 진지한 성찰과 가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는 아직 자신이 없다. 혹시 그것이 그 신속성과 효율성에 있어 거의 세계 최고임이 국제적으로 확인되었음에도 우리 사법이 진정으로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원인이 아닌지, 그리고 재판의 당사자인 일반 시민들에게도 그것이 우리 사회가 점점 더 광폭해지는 이유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종엽 울산지방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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