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어난 울산의 산수와 태화루 칭송
선조들이 진한 감동의 시문을 남겼듯
중창된 태화루서도 누정문화 꽃피길

▲ 이일걸 대한국제법학회 이사 한국간도학회 회장

임진란 때 소실된 태화루가 두 해전 중창됐다. 자장율사가 태화사 누각으로 세운지 1372년 만이다. 명승지의 누각엔 반드시 명사들의 시문이 걸려 있다. 이를 ‘누정문화’라 부른다.

울산의 누정문화를 대표하는 누각은? 곰곰이 자문(自問)해본다. 800년 동안 울산 누정문화를 이끌었던 태화루가 소실되고 일제가 헐어버리자 울산의 누정문화는 쇠퇴했다.

울산의 명승지로서 제영(題詠)의 대상은 반구대, 작천정, 망해사, 백양사, 백운정, 처용암, 망부석, 입암, 삼산, 은월봉, 관서정, 벽파정, 이수삼산정, 평원각, 제승정 등이 있었다.

우연히 구한 ‘태화루 시문’ 중에 진정한 벗(知己)과의 ‘통재지의’(通財之義)를 몸소 실천했던 이휴정 이동영과 괴천 박창우가 태화루에 올라 화답한 시문이 보인다. 이들 문중은 후손들이 350년이나 세의(世誼)를 지속하고 있다. 이휴정이 33세로 요절한 해인 1677년 이전의 사건으로 볼 때, 울산부의 객사인 학성관은 이미 복원하여 진남루에 태화루 현판을 걸었다. 이는 후기 태화루 시기로, 이후 300년이 넘도록 태화루가 누정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 일제가 ‘문화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학성관의 태화루마저 헐어버리자 울산의 누정문화마저 무너졌다.

오늘 다시 태화루 시문을 펼쳐본다. 처음 시문을 접할 때보다도 더 진한 감동이 왔다. 이미 800년 전부터 고향 울산의 빼어난 절경을 찬양한 김극기, 정포, 이곡, 민제, 권근, 서거정, 김종직 등 수많은 인물들이 오래 전부터 고향의 산수와 태화루를 아꼈다.

특히 서거정은 태화루가 천하제일의 절경임을 중국의 ‘악양루’와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했다. 또한 정포, 이곡, 권근의 태화루 시문은 ‘등왕각서’를 지은 왕발, 왕서, 왕중서의 글보다 못하지 않다고 했다. 이근필은 이백의 봉황대 시, 왕발의 등왕각서, 왕희지의 난정서, 범중엄의 악양루기, 왕원지의 황주죽루기의 문장과 최호, 왕유, 나은의 시를 인용하여 태화루중수상량문을 짓고, 울산의 빼어난 산수와 태화루가 천년만년 칭송받기를 빌었다.

장석룡은 최호의 황학루 시, 이백의 봉황대 시, 왕원지의 황주죽루기를 인용하여 태화루를 극찬하면서 중국이 ‘태화루’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한 이유를 밝혔다. 심원열은 태화루의 의미가 주역 건괘(乾卦)의 ‘태화(太和)가 보합(保合)하여야 이에 이정(利貞)한다’는 천지만물의 창조적 근원과 통한다고 했다.

태화루 시문에 이수삼산(二水三山), 오산(鰲山), 삼산산 등이 자주 나온다. 이 중 이수(二水)는 태화강과 동천강이며, 삼산은 삼신산의 준말로 인재배출의 상징이었다. 바위산인 삼산은 울산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여기에 벽파정이 있었다. 오산(鰲山) 중 내오산(內鰲山)은 은월봉 송의 태화강가 작은 봉우리이고, 외오산(外鰲山)은 삼산들에 솟은 삼신산을 일컫는 데, 일제가 비행장 구실로 파괴했다, 이를 모르고 후손들은 삼신산의 밑뿌리 바위마저 캐내어 아파트를 지었으니 이를 어찌하랴!

이제신, 이현서, 이근필 3대의 태화루 사랑도 유별났다. 같은 운의 ‘태화루’ 시를 남겼다. 손자 이근필은 ‘태화루기’를 지어면서 동정호의 악양루가 두보, 이백의 시와 범중엄의 ‘악양루기’를 얻은 후에야 이름을 떨치고 웅장한 모습이 완성되었듯이 태화루도 정포, 이곡, 이제신 등의 시와 기문을 얻은 뒤에야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고 했다.

아, 선조들이 울산의 명승지와 태화루 사랑이 이토록 지극하였음을 시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제 태화루가 관민동락(官民同樂)과 환유지락(宦遊之樂)의 장이 되어 화정(和政)한 누정문화가 꽃피워지기를 기대해본다.

이일걸 대한국제법학회 이사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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