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산태극수태극 영남알프스 18경 - (19)하늘억새길

▲ 재약산에서 촬영한 하늘억새길 파노라마. 하늘억새길 1구간인 간월산과 신불산에 이어 하늘억새길 2구간인 영축산이 멀리 보인다. 바로 아래 있는 평원이 하늘억새길 3구간 사자평이다.

그동안 탐방대는 영남알프스 18경을 두루 돌아보았다. 그 18경을 한 소쿠리에 담은 새로운 로드 명이 있어 소개를 한다. 영남알프스 명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하늘억새길’, 마을과 마을을 잇는 ‘둘레길’이다.

하늘억새길은 지상에서 가장 걷고 싶은 산악 길 중 하나로 꼽히고, 둘레길은 산을 오르기 버거운 사람들이 산책하듯이 걸을 수 있는 코스이다. 거기다 배내오재(梨川五嶺), 팔풍팔재(八風八嶺)와도 맞물려 있어 영남알프스를 탐방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신불산 골골마다 역사의 아픔 녹은 땅
사자평 가로지르는 억새길엔 사기전이
천개의 달이 뜬다는 간월산도 자리해
난개발로 생명력 잃어가 안타까움 더해

가지산,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 재약산, 천황산을 잇는 29.7㎞의 하늘억새길을 한 바퀴 돌려면 적어도 이틀이 걸리고, 77.3㎞의 둘레길을 완주하는 데는 사나흘이 소요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탐방대는 하늘억새길과 둘레길 전(全) 구간을 보석처럼 꿰어보았다.

#하늘억새길 1구간(억새바람길)

하늘억새길의 첫 관문은 간월재에서 열린다. 간월재는 형제봉인 신불산과 간월산 사이에 길마처럼 잘록한 잿마루이다. 산 아래 주민들은 간월재를 오래전부터 ‘왕뱅이 억새만디’라 불렀다. 언양 소장수 출신인 김정두 씨는 “밀양 사자평에서 소를 몰고 올 땐 오두메기를 넘고, 배내골에선 왕뱅이 억새만디를 넘었다”고 밝힌 바 있다.

▲ 배내봉 하늘억새길. 산행객이 억새가 춤추는 하늘억새길을 유유자적 오르고 있다.

이어지는 신불산은 우리나라 100대 명산 중의 하나이다. 부챗살로 뻗은 열두 험로 중에서 한 곳이라도 가 본 사람이라면 신불산이 만만찮은 산임을 알 것이다. 특히 요동치는 공룡능선(신불공룡능선, 간월공룡능선)은 칼을 심어 둔 도산검수(刀山劍水)이다.

이 공룡능선을 타려면 불세출의 균형감이 요구되는데, 균형감이 깨지는 순간 공포감이 밀려온다. 영남알프스를 매일 오르는 이유근 씨는 “신불산엘 매일 가도 지겹지를 않는 건 아슬아슬한 스릴감 때문”이라고 한다.

 

신불산이 숨긴 골짝 골짝에는 역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골 깊은 골짝은 억압받는 민중과 좌절하는 사람들의 피신처로 활용되었다. 종교적 믿음을 간직한 사람들에게는 죽음으로 열망을 지켜온 성지였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혁명을 꿈꾸는 자들의 해방구가 되기도 했다. 상처만 있고 영광은 없었으나, 스스로 일어서는 불멸의 산이다.

이어지는 신불산상벌 십리는 놀라운 세계이다. 가을의 전설 신불평원, 첩첩산중의 통로였던 신불재, 호랑이 아가리와 진배없는 금강골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왕방골 쇠부리터의 불매소리와 파래소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는 치유의 소리이다. 거기다 산을 오르는 길목에는 마을에 전해오는 전설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설치돼 있어 산악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한다.

#하늘억새길 2구간(단조성터길)

하늘억새길 2구간은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걸고 왜적을 막은 단조성, 의병들에게 화살을 전하던 시살등이 이어진다. 그리고 항일 의병과 천주교 순교자가 걷던 ‘통곡의 길’, 빨치산이 행군하던 ‘고난의 길’, 접시 등불을 켜기 위해 상어기름을 구하러 나서던 ‘장마중 길’도 이 구간에 있다. 오룡산 도태정과 백운암 암자 길은 걷기만 해도 도가 트고, 한피기 고갯길은 신평장을 드나들던 배내골 주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다. 해발 1000m급의 영축산 영축능선은 낙타봉이다. 통도사, 표충사, 운문사, 석남사 스님들이 걷던 이 깨달음의 길을 묵언으로 걸어보시라.

#하늘억새길 3구간(사자평억새길)

하늘억새길 3구간은 억새나라이다. 330만㎡에 달하는 억새나라의 지휘자는 햇살이다. 억새밭으로 난 구절양장 오솔길들을 걸어보시라. 억새가 춤추고, 바람이 노래한다. 걷기만 해도 육신이 맑아질 것이고, 생태와 수목, 야생화를 관찰하는 당신의 안목은 최고조에 이를 것이다. 지금도 사자평에는 검은 노다지를 켜던 화전민들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하늘 아래 가장 높은 학교였던 고사리분교는 영원한 모교이다.

 

사자평을 가로지르는 억새길은 사명대사 길이다. 이 길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사명대사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사명대사가 승병을 훈련시켰던 북방우희기, 사자평을 지키는 코끼리바위, 사명대사가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騰淸正·가등청청)와 담판을 지우러 가던 담판길, 조선도공이 백자를 굽던 사기전이 있다.

또한 사자평의 광활한 평원은 푸짐한 밥상이다. 산을 이고 살던 아낙들은 나물타령 노래를 부르며 줄을 서 올랐고, 남정네들은 지붕 이을 억새다발을 지고 날랐다. 고산습지 사자평은 다양한 동식물들이 공존하는 자연의 보고이기도 하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은 바로 이 십리 억새길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늘억새길 4구간(단풍사색길)

하늘억새길 4구간에는 옛이야기를 끌어안은 고개들이 있다. 짚신 신고 넘던 소금장수고갯길, 뉘엿뉘엿 떨어지는 해를 등지고 걷던 소장수 고갯길,

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층층빙곡길, 등짐을 지고 오르던 아리랑 고갯길은 자연과 인간의 발길이 창조한 옛길이다. 또한 첩첩산중의 통로였던 배내오재, 주름진 골짝에 구절양장 배내구곡이 있다.

#하늘억새길 5구간(달오름길)

배내고개는 하늘억새길 4구간과 5구간의 연결고리이다. 이곳은 장꾼들이 기러기처럼 이동하던 우마고도(牛馬古道)이다. 배내고개에서 곧장 올라가면 배내봉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는 가슴 졸이며 걸어야 한다. 발밑에는 무시무시한 저승골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고, 능선에는 눈먼 용이 부딪혀 삐딱해진 천질바위가 버티고 있다.

이어지는 천화비리는 마치 불에 거슬려 고통스러워하는 공룡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뜨는 달이 아름다운 구간이다.

매월 보름날, 하늘에 공존하는 뜨는 달과 지는 해는 대자연의 걸작이다. 선인들은 그 아름다움이 하도 빼어나 간월산에는 천 개의 달이 뜬다고 읊었다.

간월산 정상에 올라 간월 공룡능선 알머리를 타고 간월재로 내려오면 하늘억새길의 원점회귀가 끝난다. 하늘억새길의 아쉬운 점은 영남알프스의 맏형인 가지산이 빠진 것이다. 산의 족보 ‘산경표(山徑表)’는 가지산을 낙동정맥의 장자로 친다.

▲ 배성동 소설가

하늘억새길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안개에 길을 잃게 되면 자칫 벼랑길로 향할 수 있고, 거친 바위들은 살아 움직인다. 또한 그동안 강(江)에서 재미를 본 개발론자들이 난개발을 일삼는 바람에 영남의 허파는 서서히 자정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잠꼬대 같은 이야기이지만 영남알프스 일대를 떠돌다 보면 야생이 전하는 발신음을 듣곤 한다. 그 발신음은 영남알프스를 함부로 건드리는 자에게는 가차 없는 보복을 가하겠다는 경고음이다. 자연, 힐링, 이야기를 끌어안은 하늘억새길을 드나들 땐 아니온 듯 왔다가야 한다. 생명의 길, 치유의 길, 힐링의 길, 낭만의 길, 하늘억새길은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배성동 소설가

*영남알프스학교 다음 산행 7월9일(토) ‘염수봉’
문의: 010·3454·7853, http://cafe.naver.com/ynalps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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