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이 그곳으로 데려다주리라 - 양희숙 作.

사유의 틀 속을 깊이 응시함으로써 자기원형(self)의 꽃이 한겹 한겹 피어나는 찰라에 보내고 있는 조용한 시선이다. 나의 그림자(소외, 왜곡)가 찬란히 피어오르는 순간이기도 하다.

요즘 텔레비전에서는 ‘묻지 마’ 변을 당한 여성들 소식이 잇달아 보도되고 있어요. 혼자서 등산을 하다가 변을 당한 중년의 여성부터 남자 친구하고 노래방 갔다가 화장실에서 변을 당한 젊은 여성의 사건 소식은 끔찍해서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아요. 대낮에 횡단보도를 건너던 여학생이 둔기에 맞는 사건은 또 어떻고요. 심지어는 학부모가 섬마을 여선생을 집단 성폭행한 경악을 금치 못할 사건도 있지요. 피해자가 여성, 여성 모두 나약한 여성이란 사실에 더 큰 충격이에요.

세상이 미쳐가고 있어요. 한 번도 만나 본 일이 없어 서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 의해 이유 없이 생명을 잃은 여성, 학부모들이라고 경계를 풀고 함께했다가 성폭행을 당한 여성, 이들의 이야기가 결코 남의 이야기만은 아닌데 나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인데 일부 네티즌들은 피해 여성을 탓한다지요. 왜 혼자서 산에 갔느냐? 왜 남자 친구랑 늦은 밤에 노래방을 갔느냐? 왜 학부형과 술자리를 했느냐? 이것이 어찌 피해 여성을 탓할 일인가요? 그들에게도 다 이유가 있었겠지요. 대낮에 도심 한복판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데 누군가가 느닷없이 뒤통수를 후려친다면 그때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탓하실 건가요? 꽃무늬 원피스를 탓하지 마세요.

꽃무늬가 잔잔한 원피스를 입었어요
꽃들이 바람에 스멀스멀 춤을 추어요
누군가는 분명 우릴 지켜보고 있어요
오돌오돌 떨려요
호루라기를 장만해 밖으로 나갈거예요

저는요. 꽃무늬가 좋아요. 속옷도 레이스가 하늘거리는 실크보다는 꽃무늬가 잔잔하게 혹은 커다랗게 찍힌 면 속옷만 입고요. 손수건도 꽃무늬가 있는 것이라면 무조건 좋아해요. 어느 날은 시장 거리를 걷는데 이불 집에서 걸어 놓은 꽃무늬 앞치마가 하늘하늘 저를 향해 손짓하는 거예요. 환호를 지르며 가게 문 밀고 들어가서는 황급히 앞치마를 한 장 샀어요. 생각 같아서는 꽃 크기별로 색상별로 적어도 대여섯 장은 사고 싶었지만, 세상일이란 것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 수는 없는 거잖아요.

꽃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면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속의 줄리 앤드루스가 된 듯 착각에 빠져요. 춤을 추어요.

“도레미도 미도미 레미 파파미레파”

빙그르르 돌 때마다 방향 따라 쫙 펴지는 앞치마에서 꽃들이 왈츠를 추네요. 오늘 제 파트너는 키가 큰 해바라기에요. 어머, 키 높이에 얼추 맞추려면 제가 까치발을 들어야 해요. 그러자 목이 저절로 뒤로 젖혀지네요. 사뿐사뿐 꽃에 취해 춤에 취해 이따금 요리를 태울 때도 있어요. 그렇다고 꽃무늬 앞치마를 탓할 건가요? 그건 아니잖아요.

오늘은 꽃무늬가 잔잔한 푸른색 바탕의 원피스를 입었어요. 칠월의 땡볕은 뜨거워요. 더위에 지쳐 늘어지는 저를 일으켜 세우듯 원피스 바탕에 그려진 꽃들이 선풍기 바람에 스멀스멀 춤을 추어요. 의자에서 엉덩이가 들썩들썩 일어나네요. 여기는 사무실이에요. 설마 여기에서 춤을 추겠어요? 그 정도 분간은 저도 한답니다. 걷기만 해도 꽃들은 출렁출렁 춤을 출 수 있을 테니까 밖으로 나가 걸으면 되지요.

걸으면서 콧구멍을 후볐어요. 때마침 가게 앞을 지나가는 차에 탄 두 남자와 눈이 마주쳤어요. 콧구멍에 꽂은 집게손가락이 리듬을 함께 타는지 그 옛날 구닥다리 레코드판 위에서 노는 핀처럼 신나게 뱅글뱅글 돌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하필 그 모습에서 낯선 남자들과 눈 마주치다니 순간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탓 같았어요. 따지고 보면 이 또한 꽃무늬 원피스를 탓할 일이 아닌데 말이지요.

세상이 그래요. 아무도 나에게 관심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어디선가 누군가는 분명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요. 관심과 무관심의 차원이 아닌 포식자 매의 눈으로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들오들 떨려요. 이제 나의 안전은 내가 지켜야 해요.

호신용으로 호루라기를 하나 장만하였어요. 은목걸이 줄도 같이 장만했어요. 이제부터 목에 걸고 다니려고요. 밤이나 낮이나 집 밖은 너무 위험해요. 그렇다고 집 밖으로 안 나갈 수는 없잖아요. 호루라기를 걸고 나갈 거예요.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는 마구 불 거예요. 저를 해치려고 하던 치한은 놀라서 달아날 것이고 주위의 사람들은 호루라기 소리에 집중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물론 호루라기가 전부는 아니에요. 그렇지만 도움은 될 것 같아요. 작은 노력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이지요. 적어도 저는 꽃무늬 원피스 입은 탓을 하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꽃무늬 원피스를 탓하지 마세요.

▲ 정성희씨

■ 정성희씨는
·문학과 의식 등단
·비익조 동인
·울산작가회의 회원

■ 양희숙씨는

▲ 양희숙씨

·개인전 6회
·태화강국제설치미술제 외 다수의 단체전
·울산현대미술작가회 회장 역임
·울산미술대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2016 북구예술창작소 입주가 심사 및 전문위원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