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영진 사회문화팀 차장

본사가 주최하는 제6기 비즈니스컬처스쿨 1학기 강의가 최근 마무리됐다. 국악인 김준호·손심심 부부가 진행한 마지막 강의에서 김준호씨는 ‘울산아가씨’에 대해 아리랑의 원조인 정선아리랑이 영남권에 들어와 세마치장단의 ‘밀양아리랑’이 되었고, 그 가락이 울산으로 옮겨지며 ‘울산아가씨’가 됐다고 알려줬다. 실제로 학계에는 밀양아리랑과 울산아가씨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연구가 적지않다.

입으로 전해지던 우리 민요가 오선 악보로 옮겨져 신민요가 된 것은 1930년대 일이다. 고마부 작사, 조영출 개사, 이면상 작곡의 ‘울산아가씨’는 일제강점기 한국과 일본을 오가던 당시의 수퍼스타 왕수복의 노래였다. 동시에 고복수의 아내이자 그 못지않게 큰 인기를 누렸던 황금심도 이 노래를 불렀다. 남편의 영향인진 몰라도 황금심은 노래 제목까지 아예 울산말인 ‘울산큰애기’로 바꿔 달았다.

최근 울산 중구가 ‘울산큰애기’를 문화관광도시의 대표 아이콘으로 확정했다. 오는 10월 개장하는 원도심 야시장의 이름으로도 확정됐다. 중구는 큰애기의 이미지로 캐릭터를 개발하고, 이를 활용해 100개의 울산큰애기 사업을 펼쳐나갈 예정이다.

노랫말에는 울산의 또다른 명물 ‘전복쌈’도 언급된다. 쌈밥에 익숙한 사람들은 상추와 같은 겉저리로 전복을 감싼 뒤 한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먹는 장면을 떠올릴법 하지만 조선판 가정생활대백과 <규합총서>(閨閤叢書·1809)에는 전혀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다. 저자 빙허각 이씨에 따르면 ‘전복 중에 으뜸은 울산에서 가져 온 것’이었다. 전복쌈은 요즘으로 치면 만두에 가깝다. 말린 전복을 젖은 헝겊에 싸 눅눅해지면, 이를 종이처럼 얇게 저며 만두피로 사용했다. 만두속은 당연히 ‘실백자’(實柏子), 즉 껍데기를 벗긴 알맹이 잣이었다. 잣을 몇 알 놓고 전복을 반으로 접어 가장 자리를 꼭꼭 눌러 완성했다.

울산 전복이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았는지는 울산경상좌도병영성의 공납기록를 전한 <좌병영지>에서도 알 수 있다. 병영성에서는 울산만에서 건져올린 생복(살아있는 전복)과 삶아 익힌 숙복을 각각 150개씩 총 300개를 두 달에 한번씩 봉납했다. 여기에 시기를 달리하며 반건조 전복까지 추가되기도 했는데 성내에는 이 일에만 전념하는 군사가 30명이나 됐다.

당시 울산으로서는 전복 잡는 특기를 가진 두모악(제주사람)도 필요했을 것이다. 두모악에 대한 울산지역 기록은 16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될만큼 뿌리가 깊다. 이후 고지도 경상도읍지 울산지도(1832)에는 두모악의 집단거주지 ‘성황단’(지금의 태화강 하류, 반구동 일원)도 확인된다. 현재 울산대곡박물관에서 진행되는 특별전 ‘울산 역사 속의 제주민’은 이 모든 내용을 연대별로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미래 먹거리산업을 창출하기 위해 울산시가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굴뚝없는 관광산업도 그 중 하나다. 늘 우리 곁에 있었던 십리대숲이 새롭게 각광받는 것처럼, 그 동안 묻혀있던 울산의 자산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 자꾸 늘어난다. 특정 기초단체의 전유물이 아니라 울산 전체를 대표하는 아이콘 혹은 대표음식으로 발전시킬 순 없는지 다같이 고민하면 좋겠다.

홍영진 사회문화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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