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51)손정룡

▲ 손정룡씨는 해방 후 북한에서 울산으로 와 야당활동을 하면서 야당 인사들을 상대로 민주주의 고귀함을 가르치고 민주주의를 몸소 실천했던 인물이다. 신혼 초 그가 가게를 운영했던 호계시장 입구에 지금은 종묘사가 들어서 있다.

농소는 언양과 마찬가지로 야당 인사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유신 때 연행되어 고생했던 정계석, 장창수, 안석호, 이영채씨가 농소 출신이고 북한에서 내려와 민주화 투쟁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손정룡과 이경수, 나중에 부산으로 가 국회의원이 된 박대해씨도 청년시절 모두 농소에서 야당 운동을 열심히 펼쳤다.

이중 손정룡씨는 농소를 대표하는 야당 인사다. 시대적으로 그는 자유당 초기부터 야당 활동을 펴 박정희 대통령 때 유신에 항거했던 세대보다 앞선다. 이 때문에 지금은 울산야당사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지만 울산 정치인들 중 아직도 그를 존경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1920년 평안남도 용강서 출생
해방후 울산서 동아일보 지국 등 운영
공산주의·독재정권에 항거 야당생활
제3대 읍면의원 선거서 면의원에 당선
민주당 6대총선 준비위 부위원장 활동
강직한 야당인사로 명성, 존경 한몸에

그는 특정후보를 위해 일선에서 뛰지는 않았지만 울산의 야당 인사들에게 민주주의의 고귀함을 알리고 민주주의를 몸소 실천했던 인물이다. 그가 얼마나 존경받았나 하는 것은 그의 장례식이 울산시당 야당장(野黨葬)으로 치러졌다는데서 알 수 있다. 해방 후 70년 가까운 울산 야당사에서 야당장을 치른 사람은 손씨가 유일하다.

1920년 평남 용강에서 출생했던 그가 울산으로 온 것은 해방 직후다. 용강에서 지주 아들로 살았던 그는 공부를 많이 해 울산에 오기 전에는 만주에서 세무공무원으로 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방 후 그가 고향으로 가지 않고 자유를 찾아 울산으로 온 것은 공산주의 자체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울산에 온 후 결혼을 했던 그가 호구지책으로 벌인 사업이 잡화상 운영이었다. 그는 결혼과 함께 호계시장 앞에 구멍가게를 낸 후 생활용품을 팔았다. 호계시장은 그동안 많이 번창했지만 그가 점포를 낼 때만 해도 시장 일대가 농촌 지역으로 그의 집 앞으로 지나가는 7번 국도는 비포장 상태였다.

당시 이화마을에 살면서 그의 상점을 자주 찾았던 김수호(83)씨는 “손씨가 장사를 했던 50년대는 자유당 천지가 되어 자유당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살기가 힘들었는데도 그는 용기를 갖고 농소 청년들을 상대로 이승만 독재를 비난하는 소리를 자주 했다”면서 “이러다보니 주위 사람들이 그를 돕지 못해 손씨는 물론이고 가족들조차도 식량이 부족해 고구마를 주식으로 할 때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장사하는 동안 그는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했다. 동아일보 지국장이 된 것은 경제적인 도움보다는 지서로 불려 다니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자유당 독재정권을 싫어했던 그는 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어 지서를 자주 드나들었는데 지국장이 된 후 이런 불편이 크게 줄어들었다.

동아일보 지국은 그가 타계할 무렵 북한에서 그와 함께 내려 와 농소에서 야당 활동을 했던 이경수(96·농소거주)씨에게 넘겼다.

제3대 읍면의원 선거 때는 그를 따랐던 농소청년들의 요청으로 면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60년 12월 치러진 이 선거에서 그는 최다 득표로 면의회 의장이 되었다.

그가 면의장으로 있는 동안 농소면의 시급한 현안이 비료 수급이었다. 당시 비료는 배급제로 울산군이 읍면에 주면 면의 산업계가 이를 다시 각 마을로 분배해 농민들이 이장을 통해 받아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비료를 뿌리지 않으면 농작물이 잘 자라지 않아 비료가 농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물론 농가들은 비료수급의 어려움에 대비해 퇴비를 만들어 사용했지만 퇴비의 경우 비료만큼 농작물을 키우는 효과가 없어 농민들이 비료 수급에 매달려야 했다.

그러나 비료의 경우 수요는 많았지만 공급이 적다보니 면 산업계 직원들의 횡포가 심했다. 산업계는 면정에 협조하는 농민들에게는 비료를 많이 주고 그렇지 않은 농민들에게는 적게 주었다. 면 직원 중에는 또 비료를 착복해 비료수급이 민원이 될 때가 잦았다.

따라서 손씨를 비롯한 면 의원들은 그동안 관행으로 여겨온 농소면의 비료수급 부정 문제를 시정토록 건의하고 비료수급에 횡포를 부린 면 직원과 마을 이장들의 처벌을 요구했다.

3대 의회는 ‘5·16’이 일어나면서 문을 닫아 이후 그는 다시 야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가 야당 인사로 중앙정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 6대 총선이 있기 전인 1963년 2월이었다. 이 때 손씨는 울산극장에서 개최된 민주당 울산·울주준비위원회에서 권해운씨와 함께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위원장에는 나중에 울산 야당의 대부가 되는 김재호 박사가 선출되었다.

그가 최영근 의원을 만났던 것도 이 무렵이다. 6대 총선은 준비위원회가 열린 9개월 뒤 치러지게 된다. 이 때 야당 후보로 출마한 최 의원이 선거조직을 위해 각동별 조직책을 선정하게 되는데 손씨는 농소면 조직책이 되었다.

조직책으로 있는 동안 손씨는 일선에서 득표활동보다 당원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당시 최 의원의 비서로 손씨 집을 자주 방문했던 박임근(84·서울거주)씨는 “60년대만 해도 야당은 돈이 없어 선거운동을 하는 동안 운동원들에게 선거활동비를 주지 못해 미안했는데 어느 날 내가 최 의원과 함께 손씨 집을 방문하니 손씨는 자신의 집에 당원들을 모아 놓고 교육을 하고 있었다”면서 “그런데 당원들에게 밥을 대접할 형편이 못된 그가 고구마를 삶아 당원들에게 대접하면서 ‘고구마는 많이 먹지 않아도 금방 배가 불러오기 때문에 가난한 야당 인사들의 요깃거리로는 이 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말한 기억이 새롭다”고 말한다.

이후에도 최 의원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뛰었던 손씨는 최 의원이 7대 총선 후 제일생명 사장이 되어 서울로 함께 가자고 종용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그동안 울산에서 최 의원을 도왔던 많은 사람들이 이 때 서울로 갔다. 이들 중에는 박임근, 이상숙처럼 제일생명 중진으로 일하다가 은퇴한 사람들이 많다.

그는 야당생활을 하는 동안 여당 후보로부터 회유도 많이 받았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당시 그와 함께 야당 운동을 했던 이경수는 “손씨가 7대 총선에서 최 의원을 위해 선거운동을 할 때 당시 호계역에서 역무원으로 일하다가 나온 고 모씨가 김성탁 후보의 선거운동원이 되어 돈을 많이 갖고 손씨를 찾아와 손씨에게 김 후보 선거운동원이 되어달라면서 간청한 적이 있었지만 이 때 손씨는 ‘내가 이런 돈에 민주주의 신념이 흔들릴 사람이었다면 아예 북한에서 남한으로 오지도 않았을 것’이라면서 그에게 호통을 친 후 돌려보낸 적이 있다”고 회상한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는 모범을 보였다.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청년들에게는 물론이고 심지어 어린이들에게까지도 존댓말을 항상 사용해 주위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당시 호계에서 손씨와 함께 야당활동을 했던 방성호씨의 아들 재석(55·중앙대 안성캠퍼스 부총장)씨는 “아버님은 야당생활을 하면서 술을 좋아해 술을 마시고 집에 누워 있을 때가 잦았는데 이 때면 손씨가 우리 집으로 와 아버님에게 ‘젊은 사람이 정당 활동을 하려면 술을 많이 마시면 안되는데 아침부터 술에 취해 누워 있어 되겠느냐’고 나무라는 일이 잦았다”고 말한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손씨는 90년대 중반 타계했다. 이 때 오랫동안 손씨와 야당 활동을 같이 했던 김기홍씨가 그의 장례식을 야당장으로 치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장례절차가 울산최초로 야당장으로 진행되었다.

손씨의 취재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북한에서 혈혈단신 울산에 와 평생을 민주화운동에 바쳤던 그는 일선에서 투쟁을 하지 않아 행적에 비해 흔적이 없었다.

더욱이 울산에서 그와 함께 야당 운동을 한 인사들은 대부분이 타계했고 일부 살아 있는 사람들도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갖고 야당 활동을 한 사람’ ‘강직한 야당 인사’로만 그를 기억하고 있을 뿐 그의 행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손씨는 울산에서 생활하는 동안 부모 없이 어렵게 사는 어린이를 입양해 키웠는데 이 어린이가 장성해 대구로 시집을 갔고 자녀들 중 해군 장교로 제대한 후 서울에서 아직 살고 있는 아들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호계를 수소문해도 양녀와 아들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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