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지신 반영한 원도심 재해석으로
도서관·객사 포함 복합공간 바람직
주민과 소통, 다양한 경험 제공해야

▲ 정명숙 논설실장

흔히들 현대미술관으로만 알고 있는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문화예술센터는 복합문화공간이다. 9만3000㎡ 면적에 국립현대미술관, 칸딘스키도서관, 공공정보도서관, 산업디자인창작센터, 음악·음향연구소 등 4개의 주요공간과 서점, 음식점, 극장, 어린이체험공간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돼 있다. 때문에 1977년에 개관한 퐁피두는 관광객들에게 점령당한 루브르나 오르세미술관과는 달리 파리시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문화의 집’이 되고 있다.

일본의 가나자와 21세기미술관은 지름이 113m에 달하는 나지막한 원통형이다. 유리로 된 외벽은 사방 4곳으로 출입구가 나 있다. 앞도 뒤도 없고 주변은 잔디로 둘러싸였다. 지역사회의 접근성을 중시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상자처럼 생긴 14개의 전시실은 중앙통로로 연결된다. 대개의 미술관이 관람 방향을 정해놓은 것과는 달리 관람객이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한다. 건물의 내부에서 바깥 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편안한 의자도 곳곳에 배치돼 있다. ‘어린이, 노인, 장애인 그 누구든 즐거운 마음으로 다가와서 원하는 만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라는 평가가 실감난다.

울산시립미술관의 정체성을 결정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됐다. 부지 결정에 격렬한 논란이 있었지만 사실상 미술관 건립은 지금부터다. 어떤 성격의 미술관을 지을지를 결정해서 설계에 반영하는 중요한 절차의 출발점에 서 있다. 덩그러니 건축물 하나 지어놓고는 적자운영에 쩔쩔매는 결과를 만들지 않으려면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하는 과정이다.

대개의 우리나라 시립미술관은 너무 엄숙하고 지루하다. 미술관에만 들어가면 이상하게도 쉽게 지친다. 마음에 와 닿는 그림이 있어도 그 앞에 앉을 수 있는 의자 하나 없다. 의외의 흥미를 제공하는 공간도 아예 없다. 위치도 인적 드문 변두리가 많다. 애초에 그림 감상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는 ‘미술관을 위한 미술관’을 지었기 때문이다. 전국 각 도시마다 미술관이 있어도 지역주민들의 사랑도 못 받는 이유이다.

관광명소가 되기에도 역부족이다. 건축물이 아주 뛰어나든지, 세계적인 미술품을 소장하든지, 적어도 둘 중 하나는 갖추어야 외지 관광객을 불러들일 수 있을 터인데 지역여건상 둘 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전 국민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기획전이라도 만들면 다행이건만 공무원 직급에 끼워 맞추다보니 역량을 갖춘 인력을 유치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얼마나 다행인가. 울산시립미술관 부지는 공공도서관과 동헌이라는 문화재, 객사터라는 텅빈 공간에다 인구와 상권이 밀집된 도심지라는 위치적 조건까지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요건을 이미 다 갖추고 있으니 말이다. 관광명소는 못되더라도 지역주민들을 위한 ‘문화의 집’은 충분히 가능하다. 공간계획을 통해 하나의 공간을 묶어내기만 해도 가나자와21세기미술관과 퐁피두센터가 부럽지 않을 터다.

문제는 이들 공간을 하나로 뭉치지 못하는 행정이다. 시립미술관은 울산시가 짓고, 미술관 부지에 있는 도서관은 철거하고, 중구는 그 뒤편 안기부터에 새로운 도서관을 짓는단다. 개념설계 없이 별개의 이 두 건물을 구름다리로 연결한다고 해서 복합문화공간이 되지는 않는다. 동헌 활용은 문화재청이 무서워 꿈도 못 꾼다. 객사터는 객사복원이라는 장기계획만 세워둔 채 텅 비워 둘 요량이다. 이처럼 ‘따로 국밥’으론 ‘미술관을 위한 미술관’ 그 이상이 되기 어렵다.

가나자와 21세기미술관을 지은 건축가 카즈요 세지마와 류에 니시자와는 인간과 환경 사이의 관계를 면밀히 관찰, 미술관의 개념을 진보적으로 재해석했다고 한다. 울산시립미술관에도 도서관·안기부터·동헌·객사터를 재활용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새로운 해석이 먼저 필요하다.

정명숙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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