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히 흐르는 강을 끼고 앉은 절집. 신륵사는 여느 사찰과 달리 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전국의 어느 절과도 색다른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경기도 여주읍에서 2.5㎞남짓 떨어진 남한강 상류 봉미산 기슭에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신륵사가 있다. 창건설을 뒷받침할 유물이나 유적이 없으니 그야말로 전해오는 이야기이고 고려 우왕2년(1376년)때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됐다. 조선시대 들어 억불숭유정책으로 절세가 위축됐으나 경기도 광주 헌릉에 있던 세종대왕의 유택을 이 절 인근의 능서면으로 옮기면서 신륵사를 세종대왕의 원찰로 삼아 옛명성을 되찾았다. 임진왜란의 전화로 많은 건물이 불타고 오늘날의 신륵사는 현종 12년(1671년)무렵부터 중창한 것이다.  유서깊은 절인 만큼 절집규모가 웅장하고 경내에는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나옹선사와 지공·무학대사의 영정을 모신 조사당(보물 제180호), 나옹선사의 사리를 봉안한 보제존자 석종부도(보물 제228호),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 석등(보물 제231호),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등 보물급 문화재가 즐비하다.  이 절의 가람배치는 다른 곳과 달리 일주문을 들어서 경내로 들어가면 명부전과 종각이 있고 그뒤로 다층석탑을 중심으로 적목당 구룡루 심검당(요사) 극락보전이 사방으로 배치돼 있고 그뒤로 봉향각과 수각 칠성각 있는 1자형이다. 그래서 얼핏 산만한 느낌을 준다.  극락보전 앞에 있는 다층석탑은 대리석으로 축조해 다른 절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질감의 탑이며 다층전탑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벽돌탑으로 한반도 중부지방에서는 하나뿐인 전탑으로 꼽힌다.  이 탑은 절보다 더 잘 알려진 신륵사의 대표적인 문화재로 꼽히는데 강변 바위위에우뚝 솟아 있어 강을 등에 지고 절을 호위하는 호법신장같은 느낌을 준다. 벽돌을 구워 하나하나 쌓아올린 이 탑으로 인해 고려때 이후로 이 지방민들 사이에는 "벽절"이라 불리기도 했다.  신륵사를 중심으로 관광지구가 조성돼 있어 이 곳에서 숙식이 가능하며 이웃 세종대왕릉과 목아불교박물관, 석봉도자기미술관 등이 차로 30여분이내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더구나 이곳 신륵사관광지구에는 오는 8월10일부터 10월28일까지 열리는 세계도자기 엑스포가 행사장이 마련돼 있어 관광코스로는 안성맞춤이다.  여주는 광주 이천과 더불어 우리나라 도자기의 요람으로 이 세지역을 묶어 올해 처음으로 도자기엑스포가 열린다. 엑스포준비가 벌써부터 한창이다.  석봉도자기미술관(031·632·7007)은 석봉 조무호씨가 사재를 털어 만든 미술관으로 조씨의 작품을 비롯해 국내외 유명 도예가들의 작품을 일반에 선보이고 있다. 조무호씨는 도자기판벽화에다 광물질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으로 유명한데 이 미술관에는 역사의 인물이나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들과 함께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접시로 기록된 춘하추동 사계대명 등이 전시돼 있다. 엑스포준비를 위해 5월까지는 일반인 관람을 제한하고 있다.  여주에서 서울쪽으로 차로 20분거리에 이천이 있는데 이천의 광주요(031·632·7007)는 조선왕실의 관요 광주관요의 맥을 이어 지난 63년 형성된 도자기의 집산지다. 이곳에는 전통도자기의 문양 기법 등을 현대에 접목한 수준높은 생활식기들을 구경할 수 있다. 순수한 도자 예술작품의 감상을 원한다면 이곳에 인접한 지순택요(031·632·7009)를 찾아보면 된다. 지순택요는 경기도 지정문화재 4호였던 고 지순택옹이 세운 도요로 도자기제조과정을 직접 볼 수 있다.  ◇길라잡이=울산에서 여주까지는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 올라가면 된다. 여주IC로 빠져나와 여주읍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명성황후 생가, 세종대왕릉을 알리는 표지판이차례로 나온다. 차로 10여분가면 신륵사관광지구에 도착한다.  ◇아는만큼 보인다 〈불탑〉  불탑은 처음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나눠 보관했던 데서 유래한다. 우리나라에는 인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이르고 중국에서 오랜 세월 머무르다 "중국화"한뒤 삼국시대에 불교공인과 함께 사리가 전해지면서 그 조성양식도 전래됐다.  초기에는 나무로 만드는 목탑이 조성됐다가 약 200년이 지난 6세기말경부터는 돌을소재로 한 석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옮겨오는 그 중간에 전탑(벽돌탑)이 있었다. 고신라시대에는 목탑과 전탑이 병존했을 것으로 보인다.  전탑은 중국에서 널리 유행한 양식으로 우리나라도 중국의 것을 모방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고신라의 전탑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고 통일신라기 이후 혹은 신륵사의전탑처럼 고려시대의 것이 소수 전한다.  한국의 전탑 가운데 최대의 탑은 안동에 있는 국보 제16호 신세동 칠층전탑이다. 이 외에 안동 동부동의 5층전탑(통일신라시대-보물 제56호), 조탑동의 5층전탑(통일신라-보물 제57호), 그리고 경북 칠곡군의 송림사 5층전탑(통일신라-보물 제189호)이 전한다.  경주에 있는 분황사 모전석탑은 이름그대로 전탑의 양식을 빌린 석탑으로 안산암을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탑이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은 나라로 석재가 풍부한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 그래서 벽돌을생산해야하는 어려운 수공 대신 산야에 흔한 화강암을 가져다 탑을 조성하게 된다. 이후 우리나라 불탑의 양식은 석탑의 형태를 취하게 되는데 통일신라부터 고려초에 이르기까지는 돌을 다루는 기술이 절정에 달해 불국사의 다보탑처럼 목탑에 비견할 만큼 화려하고 섬세한 탑의 조성을 보게 됐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