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산을 이고 사는 사람들-(1)범사냥꾼

▲ 운문사에 그려진 호랑이 벽화. 화덕 같은 눈으로 쏘아보는 호랑이의 눈에서 쌍심지가 튄다.

영남알프스학교 제공

대한제국이 을사조약으로 세계지도에서 사라진 광무 9년(1905년) 동짓달. 기세 좋게 퍼붓는 눈발을 뚫고 산을 오르는 범사냥꾼들이 있었다. 조선 착호갑사 출신 도포수와 그의 수하에 있는 상투 튼 사냥꾼들의 설피 걸음걸이는 거칠었다. 그들은 외진 화전밭을 개간하던 동네 아낙을 호랑이가 물고 달아난 사단이 벌어져 추적에 나선 것이다. ‘제 놈이 어디에 숨어도 다 찾아내고 말지’ 얼마 전 석남사 스님 실종 사건 때에도 가지산 흰바위에서 까까머리 머리통을 찾아냈던 그들은 기어코 운문산 범굴에서 비녀 찌른 아낙네 머리통을 수습했다.

 

조선인 총포금지령에 영남알프스 포수 사라졌지만
오부자 포수 김재한만 일제강점기에도 명성 이어가
해방전 호랑이는 사라지고 표범만 간신히 살아남아
1983년 재약산 자락에서 찌개틀에 걸려 마지막 포획

영남알프스 근동 백리를 누리고 다녔던 사냥꾼들은 불패신화 척화갑사(捉虎甲士)의 후예들이었다. 호랑이 사냥 명령이 떨어지면 사냥꾼들이 출동했다. 그들은 짐승을 발견하면 오뉴월 서릿발 눈깔로 변했다. 봤다하면 두 번 안 당기는 우두머리 도포수는 사냥을 지휘했고, 부(副)포수와 자욱포수, 목포수, 몰이포수들은 엄한 규율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기록에는 울산 방어진 목장에도 착호갑사가 근무를 했는데, 다섯 마리의 호랑이를 잡아 특별 승진을 한 기록과 호랑이를 소탕한 착호비(捉虎碑)가 전해져오고 있다.

▲ 운문산 상운암 계곡의 범굴 수색. 호랑이가 거(居)하던 산이었던 호거산(운문산·범봉) 일대에는 범이 숨을만한 바위굴이 많다.

영남알프스학교 제공

나는 착호갑사와 사냥꾼들이 맹호를 쫓던 사냥길을 추적해 보기로 했다. 먼저 호사(虎事)가 많은 석골사 계곡을 열어 범굴과 범봉 수색에 나섰다. 산을 오르기 전에 석골마을에서 만난 한 노파는 “참나물 만디 딱밭에 나물 캐고 내려오다가 억산방구에서 범 보고 놀래 자빠진 적이 있지”라는 말을 해 겁을 줬다. 또 운문사를 오르다가 만난 상운암 스님은 “앙, 앙 소리를 내며 바위틈 수풀 속에서 달려들기에 망할 놈, 공부하러 왔는데 나를 노리다니. 썩 돌아가지 못할까! 큰소리를 치고 뛰어 내려갔죠”라는 최근 목격담을 보탰다.

 

운문산 일대에는 주변 관망이 용이한 바위가 많고, 범이 새끼를 키우기에 좋은 바위굴이 많은 편이었다. 함화산범굴, 팔풍재범굴, 얼음골범굴, 정구지범굴, 대비골범굴, 군함바위범굴을 차례차례 뒤졌다. 해발 800m에 있는 함화산범굴은 이중으로 뚫린 바위굴이었다. 깊이 5m 바위굴 안을 들어가니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로 모기떼가 극성이었다. 이 바위굴엔 슬픈 전설이 전해온다. 호거산 맹호에게 자식을 잃은 부모가 시신 부패를 막기 위해 함박꽃을 덮어 굴속 장례를 치렀다는 전설이다. 마침 내가 찾아갈 무렵에도 바위굴 주변에는 함박꽃 향기가 그윽했다.

아흔아홉 가파른 팔풍재를 안간힘으로 올라 범봉(962m)과 운문산(1195m)엘 도달하자 첩첩지맥이 펼쳐졌다. 한때 호랑이가 호령했던 이 산군을 호거산(虎居山)이라 한다. 가지산에서 운문산, 억산, 지룡산을 잇는 능선, 그리고 음기 흐르는 계곡은 맹호가 서식하기에 적합한 장소로 보였다. 나는 내친 김에 과거 호랑이 소굴로 불리던 심심이골로 갔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라고 했다. 빗물에 머리를 감고 바람에 빗질해가면서 맹호를 추적해오길 어느 듯 10년. 야생에 물들어 이미 인간말짜가 다 된 꼬락서니였다. 대한제국이 망하기 전만 해도 삼심이(학심이·심심이·오심이)는 호랑이 골짜기였다. 일 년 내내 볕이 들지 않는 심심이골, 새가 울어도 무서운 오심이,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에도 뒤가 켕기는 학심이과 천문지골, 대비골을 물불 가리지 않고 쏘다녔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맹호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고, 백운산에서 담비 발자국을 봤다.

영남알프스에서 포수들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은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어 조선인 총포금지령이 내려진 이후였다. 나라를 빼앗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총을 든 일본인이 하나둘 드나들더니 1926년 무렵부터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됐다. 조선조 말 무렵만 해도 맹호는 근동 100리를 설치고 다니며 가축과 인명을 닥치는 대로 물어 죽였다. 능동산 살티마을에서는 포졸에게 끌려가 참수된 천주교 신자보다는 호랑이 밥이 된 천주교인이 더 많았고, 운문령에서는 소장수와 소떼가 실종되는 등 도처에서 희생자가 속출을 했다. 전국적으로 맹호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자 사냥개와 몰이꾼을 동원해 크고 작은 짐승들을 잡아들였다. 운문산 일대에서 만고풍상을 겪은 한 약초꾼은 “왜놈 사냥꾼이 설치면서 호랑이가 사라졌다”고 목청을 올렸다.

영남알프스 일대에서 총기소지허가를 받은 첫 인물은 양등 부자 김재한이었다. 엽총을 살 여력이 안 되는 가난한 배내골 포수(김진택·이수업)들은 손쉬운 목포수로 활동했고, 살티골 포수(정원식·이원갑·이종영)은 올무나 덫을 쳐 야생동물을 잡았다. 짐승이 다니는 길목을 잘 아는 김진택씨는 재약산 자락에서 찌개틀(목매)로 표범을 잡아 유명해진 포수이다. 목매에 포획된 표범이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왈~~하고 달려드는 것을 보고 놀란 김씨는 엽총을 소지한 부산 포수를 불러 잡았다.

일제강점기 영남알프스 일대를 주름 잡은 사냥꾼은 누가 뭐래도 김재한(1893년생) 포수였다. 천석꾼 집안에 천하 한량이었던 그는 몰이꾼을 동원한 사냥을 했다. 아버지를 따라 사냥질에 나선 그의 아들 넷과 함께 오부자 포수로 이름을 날렸다. 오부자 포수 중에서 30년 포수 길을 걸어왔던 막내아들 덕동(1937년생)씨는 지난 해 타계했다. 생전에 내게 여러 차례 사냥담을 구술해 준 덕동씨는 부잣집 아들답게 통이 크고 시원시원했다.

▲ 명포수로 명성을 떨쳤던 양등리 김재한(오른쪽) 포수. 김포수가 든 12구경 수평쌍대 엽총은 두 발 넣고 꺾으면 실탄이 장전되는 미제 엽총이다. 영남알프스학교 제공

“자랑할 것은 아닙니다만 아버지와 우리 4형제는 오부자 포수였지요. 아버지가 소지한 총은 일본에서 구입한 최신형 엽총이었습니다. 1926년 그 엽총으로 석남사 절위에서 표범 한 마리를 잡았어요. 잡은 표범 호피를 딸 시집보낼 때 가마에 덮어 보냈는데, 사돈집에서 호피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김 포수가 남긴 흑백사진 속의 총을 본 울산 황종만(93) 포수는 “일제 때 이 총을 들었다면 대단한 분이야. 이 총은 논 다섯 마지기 줘야 살 비싼 총이야. 12구경 수평쌍대야. 수평쌍대는 두 발 넣고 딱 꺾으면 실탄 장전하는 미제 총이지. 그런데 이 영감 다 죽어 가는 얼굴상 보니 총도 근근이 매고 있구만. 전문 사냥꾼이 아니고 돈 자랑하는 양반 같애”라며 나를 빤히 보며 설명했다.

김 포수는 사향노루 사냥을 즐겼다. 사향노루는 명포수 아니고는 잡기 어려운 짐승이다. 암놈은 약이 안 되니, 성기 끝에 달라붙은 오줌 찌꺼기와 기생충이 약이 되는 수놈 사향노루를 찾아 다녔다. 가지산 흰바위 인근에는 표범뿐만 아니라 멧돼지도 많았다. 산죽 무더기에서 흙을 파고 자는 멧돼지는 흙더미에서 구불다가 사람을 보면 비호처럼 달려든다. 성이 난 멧돼지는 이를 드러내고 눈을 흘리고 달려든다. 강한 송곳니에 찔려 창자가 터지거나 다리가 부러지는 꾼도 있었다. 김 포수가 고용한 몰이꾼은 보통 서너 명 정도였다. 그는 짐승을 잡으면 몰이꾼에게 3분의 1을 나눠 주었다. 고기가 그리운 시골 몰이꾼들에겐 그저 그만인 셈이다. 거기다 그를 따르는 몰이꾼에게 논을 붙이게 해주거나, 사냥 중에 그들의 집에서 끼니를 때우더라도 꼭 밥값을 지급했다고 한다.

영남알프스 일대에서 호랑이가 자취를 감춘 것은 해방 전으로 추정된다. 1926년부터 끈질기게 맹호를 추적했던 김재한 포수도 호랑이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반면에 호랑이보다 개체수가 많은 표범은 한국전쟁에도 용케 살아남아 주민들의 눈에 종종 띄곤 했다. 오부자 포수 덕동씨는 한국전쟁 후에 가지산, 천황산, 사자평 주암계곡을 돌아다닌 표범을 5~10마리로 추정했다. 그는 “이 지역에 표범은 있어도 호랑이는 일제 때 사라졌다는 말씀을 아버지께서 여러 차례 하셨다”고 했다. 호랑이는 해방 전에 자취를 감추었고, 표범만 남게 된 것이다.

▲ 배성동 소설가

영남알프스 일대에서 범사냥꾼들에게 걸려던 표범을 정리하면 이렇다. 1926년 김재한 포수가 가지산 석남사 뒤 흰바위에서 표범 한 마리를 사냥했고, 1944년 배내골 주계덤에서 이수업씨가 목매사냥한 호피는 상북주재소에 빼앗겼다. 1960년 살티골 정원석씨가 가지산 부처바위에서 강철선 올무로 잡은 표범 호피는 부산으로 갔다. 1972년 가지산에서 성명미상의 포수가 몰래 잡았다는 표범, 그리고 1983년 재약산 자락에서 배내골 김진택씨가 찌개틀(올무)로 잡은 표범은 오랜 추적에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영남알프스학교 다음산행

8월7일(일) 운문령 생금비리 옛길

문의 010·3454·7853, http://cafe.naver.com/ynalpsschool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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