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산을 이고 사는 사람들 (2)신불산표범과 오부자포수

▲ 1944년 촬영된 신불산표범. 마치 살아있는듯한 생생한 모습으로 가죽 대신 사진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중간에 있는 인물이 5부자 중 한 사람인 김해동 포수. 김덕동 포수 제공

개 대가리 찜 쪄 먹을 기록적인 불볕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날, 나는 반세기 전 영남알프스 일대를 주름잡았던 ‘5부자(五父子)포수’의 사냥 길을 찾아 나섰다. 가지산, 간월산, 배내봉, 오두산, 송곳산, 어심내기, 범등붕띠기, 부엉이바위로 이어진 거리오담 사냥 길은 불볕더위에 엿가락이듯 휘어져 있었다. 당대 상북고을 천석꾼이었던 5부자포수의 생가는 범이 출몰했던 양등마을에 있었는데, 대지 5289.3㎡(600여평)에 기와집이 일곱 채나 되는 고택이었다. 5부자포수 후손들이 오래전 부산으로 이주한 탓에 고택은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지만 화단에 세워진 비보상석만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勿蛔一花’(물회일화). 비보상석의 속뜻처럼 탈 없이 부귀영화가 이어지길 염원했지만 삼대를 가질 못했다.

 

내가 전설적인 5부자포수를 알게 된 것은 거리오담에서 만난 촌로의 어쭙잖은 제보로부터 시작됐다. 5부자포수를 잘 안다는 박정순(96) 할머니는 긴가민가 싶은 표범이야기를 늘어놓았고, 나는 중요하든지 말든 상관없이 억센 사투리를 끝까지 들었다. “상북주재소 순사와 친한 그 냥반, 비까번쩍하는 총 들고 다녔심더. 그래가, 그 집 아들 넷도 말카(전부) 총잽이 됐다 아잉교.” 5부자포수에 대한 기억을 아련히 떠올린 박 할머니는 이어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더 보탰다. “주재소 앞에서 머리 둘 달린 범을 끌어안고 좋다고 사진 찍는 걸 봤심더. 왜놈 순사가 찍어주데요. 범은 얼룩무늬 매화꽃 점박이였심더.”

우연한 제보로 시작된 ‘전설의 오부자포수’ 찾기
김재한 포수 막내아들과 만나 표범사냥 실체 확인
살아있는듯한 표범과 찍은 사냥기념사진도 보여줘
아직 영남알프스 어딘가 살아있을거란 기대감 전해

나는 박 할머니가 말하는 5부자포수를 수소문해 갔다. 2대에 걸쳐 범 사냥을 해온 5부자포수 중에서 인연이 닿은 분은 부산에 거주하는 막내아들 덕동(1937년생)씨였다. 명포수답게 시원시원하고 불칼 같은 성격인 그는 미지의 사냥세계를 안내하는 길라잡이가 돼줬다. 그가 사는 부산을 찾아가거나, 그가 언양고을로 올라왔다. 그와 만나면 신불산, 가지산, 능동산, 송곳산, 배내골, 살티, 양등마을의 사냥 길을 함께 돌아다녔다. 몇 년간의 사냥 길 탐방은 반세기 전에 사라진 영남알프스의 사냥세계를 읽어내는 활력소가 됐다.

 

한 번은 그가 놀랄만한 사진 몇 장을 들고 왔다. 1944년 12월 일본 순사가 상북주재소에서 찍어주었다는 신불산표범이었다. 그러니깐 박 할머니가 상북주재소 앞에서 봤다는 그 표범이 60년 만에 거짓말처럼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신불산표범은 마치 살아있는 생생한 모습으로 가죽 대신에 사진을 남기고 떠난 것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44년 12월 촬영된 신불산표범 사연을 여차여차 꿰맞추면 이렇다. 사진 중앙에 있는 인물은 5부자포수 중의 맏형 해동(당시 23~24세)씨이다. 그리고 그의 고종형 안재형(당시 29세·부산 거주), 정진천(당시 26세·양등 거주)이 함께 포즈를 취했다. 사진 하단의 ‘운문산 맹호’(雲門山 猛虎) 글씨는 사진을 보관해 오던 가족들이 해방 후에 쓴 걸로 보인다. 이들이 납작모자와 제국모(도리우찌모자), 당꼬바지, 고급시계를 차고 있는 걸로 봐서는 부잣집 서방님 티가 난다. 당시 행사깨나 하려면 일본식 신사복에 금줄 회중시계를 달았는데, 이들은 흔치않은 손목시계에 값비싼 개화 신사복장을 하고 있다.

5부자포수 중에서 아버지인 수계 김재한(金在漢)은 당대의 명포수였다. 명포수라서 명포수라가 보다 귀한 엽총을 일본에서 구해온데다, 그 엽총으로 표범까지 잡았으니 유명세를 탄 것으로 보인다. 1894년(갑오년) 울산군 상북면 양등리 495번지에서 천석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외모는 하관이 빠르고 호리호리한 편이다. 어리버리한 몰골과는 달리 일본어를 잘 하는 한량이었다고 한다. 짐승을 잡으면 마을사람들과 나눠 먹었고, 인간미가 넘치다보니 동네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 순사들과도 친했다.

하지만 상북고을 사람들은 호랑이 잡으러 다니는 그를 반미치광이로 여겼다. “아이고, 해 있는 꼴 보라모. 바람 잽이 아닌교? 그 냥반 온 천지 돌아다녔다 아잉교.” “두고 봐라. 찔락거리고 다니는 저 냥반 미치거나 집안 망할거다.” “영물을 잡으면 뒤가 안 좋아.” “살림이란 일대는 모르지만 날아갈 때는 하루하루가 다르지.”

▲ 5부자포수 가족들. 왼쪽 두 번째 갓을 쓴 김재한 포수 바로 옆에 막내아들 덕동이 서 있다. 김덕동 포수 제공

김 포수가 1924년 일본에서 엽총을 사온 2년 후인 1926년, 그는 드디어 그동안 노리던 표범을 잡게 된다. 덕동 포수는 영남알프스 일대에서 벌어진 표범사냥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1926년 아버지가 가지산 비알 부처바위 인근에서 표범을 사냥했어요. 그 후에 1944년 주계바위에서 이수업씨와 배내 백련동 김진택씨가 올무로 표범을 잡았고, 살티 정원석씨가 아버지가 잡은 그 장소에서 찌개틀(목매)로 잡았어요. 마지막으로 1972년 가지산에서 어느 포수가 마지막으로 잡았다는 소릴 들었습니다.”

전설의 고장김덕동
가지산 흰 구름아 쉬었다 가려무나 / 쌀바위야 너도 가자 / 귀방구는 우짜꼬 흰 바위가 쳐다보고 싱긋이 웃고 간다 / 동골 드린바위에 버섯 따는 나그네야 / 왕거미 줄을 타니 이 일을 어찌할꼬 / 고헌산 왕들겅 위를 연 꼬리처럼 휘이 휘이 날아가는 칼치 칼치 산칼치야 / 어디가고 안 보이나 다시 한 번 날아다오 / 니가 가고 아니오니 간월산 천질바위 아래 산고동이 나를 찾아 울고 있네

김 포수는 그의 아내가 차남 국동(1927년생)을 임신 중일 무렵에 표범을 잡게 됐는데, 뱃속에서 새끼 세 마리가 나왔다. 범은 보통 두세 마리의 새끼를 놓는다. 그 중 생존해 있는 새끼가 한 마리 있었다고 한다. 집안어른들이 산모에게 범 새끼를 고아 먹으라고 권했지만 “아들을 놓으면 장군을 낳을 것이고, 딸을 낳게 되면 왈가닥을 낳게 될 것”이라는 주변사람들 말에 포기를 했다.

김 포수는 맏딸 정숙을 신진수(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부친)에게 시집보낼 때 그가 잡은 표범의 가죽을 4인 가마에 덮어 씌워 보내 사돈집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차녀 복선은 언양 출신 조용기 목사의 모친이다. 그리고 차남과 사남 덕동은 30년 이력의 베테랑 포수였다. 제일제당에 근무했던 삼남은 사냥을 좋아하는 이맹희(전 CJ그룹 명예회장)에게 발탁돼 사냥질을 이어갔다.

김 포수의 맏이 해동씨가 표범을 잡았다는 소문은 다소 와전된 면이 있다. 덕동씨의 말에 따르면 해동씨가 안고 있는 표범은 그가 잡은 것이 아니라, 배내골 촌부 이수업이라는 사람이 멧돼지를 잡으려고 쳐놓은 올무에 걸려든 것을 청부 사살한 것이라고 한다. 수렵허가가 없는 촌부 이씨는 밀렵한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 수렵허가와 엽총을 소지한 김재한 포수에게 부탁했고, 그는 장남 해동을 보내 사살케 했던 것이다. 당시 해동씨가 쏜 엽총은 양쪽에 총대가 있는 12구경 수평쌍대였다. 일반사냥꾼들은 훌치기 총을 썼다. 실탄 한 발 넣고 쏘고, 손잡이 당겼다가 또 한 발 쏘는 5연발 엽총이다.

그런데도 사진 속 표범이 마치 살아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사진촬영을 위해 목 뒤에 철심을 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련한 울산 큰포수(박 포수로 알려짐)는 녀석이 죽은 놈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범 콧수염이 안 보여. 콧수염을 다 뺀 거로 봐서는 죽은 놈이 분명혀.” 당시 표범을 잡으면 너도나도 흰 콧수염부터 빼 갔다. 특히 소를 몰고 험한 산을 넘어 이 장터 저 장터를 드나들던 소장수들은 잡기를 쫓으려고 범 수염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울산 큰포수는 “나도 한 땐 짱짱한 사냥꾼 소릴 들었지만 표범 호랑이는 못 봤어.”

반면에 백전노장 황종만 포수는 다른 의견을 냈다. “이 놈 살아있는 게 확실해. 눈이 부리부리 하잖아. 죽었으면 모가지가 쳐지고 눈도 착 감길 테지. 사람이 붙잡아도 목이 쳐지지. 봐라, 가죽장갑 낀 손은 그냥 머리에 얹고만 있지 않나. 죽었다면 뒷통술 쥐어야지. 거기다 귀가 쫑긋 뒤로 선 걸로 봐서는 뒤에 있는 인기척을 느껴 경계하기 위해서야. 아마 어디에서 사육한 범일 줄도 몰라.”

▲ 배성동 소설가

호랑이는 백두산에서 방어진을 오가는 장거리 주자라면, 표범은 단거리 주자이다. 또 호랑이는 주먹쟁이인 반면에 표범은 색시 같은 존재이다. 암수 두 마리가 어울려 다니는 표범은 경계가 많고 반경 20~30㎞내를 쏘다닌다. 반면에 홀로 생활하는 호랑이는 백두산에서 남목 동대산까지 끝없이 돌아다닌다. 표범은 주로 매복을 해 있다가 덮치고, 호랑이는 정면 승부를 한다. 거기다 호랑이는 닥치는 대로 죽이는 반면에 표범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영남알프스 구석구석 발길 닿지 않는 데가 없었던 덕동씨는 산 주름 깊은 주계덤 사자평 일대를 표범 서식처로 지목했다. “가지산, 천황산, 사자평 주계바위 일대를 돌아다니는 표범 숫자가 5마리 정도 됐어요. 영물이라 사람 눈엔 전혀 띄질 않습니다. 지금도 표범은 어딘가 있습니다. 우리 같은 전문가가 산에 가 보면 알 수 있어요.”

영남알프스를 무대로 야생짐승을 쫓던 그는 ‘전설의 고장’이라는 시를 남기고 저 산으로 하직했다.

배성동 소설가

*영남알프스학교 다음산행 8월19일(금) 배내봉 천화비리 달빛기행
문의 010·3454·7853, http://cafe.naver.com/ynalpsschool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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