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비옥산성- 세곡과 공수를 보관하던 창고성

▲ 1872년 제작된 <울산서생진지도>에 표기된 남창(공수창).

울산을 성곽의 도시라고 말하는 데에는 그 수(數)가 많은 것은 물론이고, 성곽의 표본실이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유형이 있다는 것도 포함된다. 그리고 그 몇몇은 성곽의 인접지역 성격(기능)과 연계되어 미스터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성곽의 다양성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높여주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중요성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한 성곽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덕신리 산 294번지의 비옥산(飛玉山) 정상부 일원에는 비옥산성(飛玉山城)이라고 불리는 돌로 쌓은 성곽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성의 둘레는 300m에도 못 미치는 작은 규모이며, 산 정상에 위치하고는 있지만, 성곽 외부로 경사가 거의 없이 평지에 가까운 완만한 지형이 넓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곳의 산성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느낌을 받는다.

비옥산 정상에 성곽 흔적 남아있어
평지 이어져 전투용 기능 취약
여행 편의제공 ‘공수곶원’ 가능성
조선시대 남창은 곡창지대로
공무 요충지이자 세곡 집결 장소
왜란 전후 빈번한 왜구의 침입에
세곡 안전 위해 별도의 성곽 필요

비옥산성에 대한 기존의 학설이나 문화재 안내문을 토대로 살펴보면, 산성의 인근에 하산봉수대와 서생포만호진성 등이 위치하고 있어 울산의 동남해안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비옥산성 주변으로 산정(山頂) 평지가 이어져 군사적 방어 기능이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비옥산성이 위치한 울주군 온산읍 덕신리와 연결된 온양읍 동상리 일원의 옛 지명은 공수곶(公須串)이다. 이에 대해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은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 울산편 원우(院宇)조의 ‘공수곶원(公須串院)은 울산군의 남쪽 온양리에 있다’는 것이다.

▲ 비옥산성 성벽 잔존상태.

원(院)이란 조선과 그 이전에 여행의 편의를 제공하던 시설중의 하나로 조선 세종 때에 거듭 정비해 인근 주민으로 원주(院主)를 삼고, 토지를 지급해서 관리하게 했다. 그리고 당시 공적 임무를 띤 관리는 병조(兵曹)에서 발급한 초료(草料)라는 문서를 지니고 각 원(院)에 들러 숙식을 제공받았다. 그러나 원은 공적 업무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여행자나 상인(商人)들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공적(公的) 임무로 지방을 다니던 관리나 사신의 경우, 원보다는 역(驛)을 더욱 많이 이용했고, 이 때문에 조정(朝廷)은 역(驛)제도의 정비에 보다 심혈을 기울였다. 따라서 공수곶원은 공적업무의 측면에서 보면, 역에 비해 그 격(格)이 조금 못 미친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의 이름이 공수곶(公須串)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수(公須)란 공용(公用)의 의미가 있으며, 공적(公的)인 쓰임 또는 관(官)의 비용을 뜻한다. 그리고 공수위(公須位)라 하여 조선시대 지방 관청의 경비(經費)를 위해 주(州)·현(縣)·역(驛)·관(館)에 지급하던 토지(田) 또는 사신이나 파견 관리의 접대(接待)를 위한 경비를 줄인 말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울산 최초의 읍지인 <학성지(鶴城誌, 1749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울산의 면(面)이름을 기록한 부분에서 ‘온양면에 공수(公須)가 있는데, 옛날에는 현(縣)이 있었으나, 지금은 창고(倉)가 있다’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책의 창고(倉庫)편에 ‘공수곶창은 고을의 남쪽 40리(里)에 있다. 즉 지금의 남창(南倉)이다. 광해군 무오년(1618)에 울산부사 윤경득(尹敬得)이 민원(民願)에 따라 다시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뒤이어 편찬된 <울산부여지도 신편읍지(1786)>에도 ‘남창은 온양면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러 고지도(古地圖)에도 공수곶 일원에 공수곶창(公須串倉)·공수창(公須倉)·남창(南倉)이 표기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 언급된 창고는 모두 현재의 남창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서창(西倉, 현재 경남 양산시 웅상)과 함께 조선시대 울산을 대표하는 세곡(稅穀) 창고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공수곶 즉 남창 일원은 조선시대 울산 남쪽 지경(地境)의 세곡을 집결한 장소이자 중요 관료들이 들러 공무를 보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울산부선생안(蔚山府先生案)>을 살펴보면, 도호부사 통훈대부 원석범(元錫範)의 1828년의 행적에 ‘남창참사(南倉站舍)는 별성(別星, 중요한 관리)들이 들리는 지참(支站, 역과 역사이의 별도 역)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도호부사 통훈대부 김기순(金箕絢)의 1846년 행적에도 ‘온양면(남창)과 웅촌면(서창) 두 면은 울산의 서쪽과 남쪽의 큰길에 있어 사신(통신사 등)의 행차가 많은 지참(支站)이므로 소요되는 비용이 다른 면에 비해 가장 힘들고 무거웠다’고 기록되어 있어 남창 일원은 공수곶원과는 별개로 역(驛, 站)을 운영하여 세곡의 보관과 사신 접대 기능을 겸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남창 일원처럼 행정지역이 구분되는 지경(地境)에 위치한 역원(驛院)은 각도(道) 관찰사가 해당 도내(道內)를 순찰할 때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고, 그와 같은 기능은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에 위치했던 공수포(公須浦)의 경우에도 울산의 공수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황폐해진 기장현은 1617년 기장의 남쪽 일원을 동래현에, 북쪽 일원은 울산도호부에 각각 나누어 편입시켜 기장현의 행정구역이 없어지고 말았다. 당시 기장의 공수포는 울산과 면한 지경이 되었고, 역원(驛院)의 기능을 겸하는 공수창(公須倉)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이듬해인 1618년에 울산부사 윤경득이 울산의 지경에 해당하는 현재의 남창 일원에 공수창(公須倉)을 조성했던 것이다. 당시 울산 남창(공수창)의 모습은 1872년에 제작된 <울산서생진지도>에 명확히 그려져 있다.

그런데, 1618년 조성된 울산 공수창은 <학성지>의 내용에 ‘민원에 따라 다시 만들었다(因民願重設)’고 기록되어 있다. 즉 당시는 정유재란이 끝난 지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소실(消失)되었던 것을 다시 만들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남창으로부터 남창천과 회야강을 따라 동쪽으로 불과 6㎞만 내려가면 동해(東海)가 있고, 임진왜란을 지나며 왜군(倭軍)이 만든 서생포왜성이 있다. 그리고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이 왜장(倭將)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협상을 위해 수차례 서생포왜성에 들린 일을 기록한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에서 남창 일원이 곡창지대였음을 살펴볼 수 있다. 즉 남창지역은 내륙에 위치한 서창(西倉)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험요소를 항상 내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임진왜란 전후 시기에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남창지역의 세곡(稅穀) 보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당시 회야강 하구(河口)에는 서생수군진(西生水軍鎭)이 위치하여 남창일원의 해안방어를 담당하고 있었지만, 보다 견고한 세곡 안전을 위해서는 별도의 성곽이 필요했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곡을 보관하고 지키는 성곽을 창성(倉城)이라고 한다. <세종실록> 127권 세종32년(1450년) 1월의 기사에 ‘용산(龍山)에 창성(倉城)을 쌓고 서강창(西江倉)을 합병하여 하나로 만들어 상류(上流)에서 조운(漕運)하여 오는 것은 두모포(豆毛浦)에다 창고를 지어 간수하게 하고, 성을 쌓아서 보호하게 하면…도적이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조선초기에 두 물줄기가 합수(合水)하는 지점에 창성의 건립이 더러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울산의 남창인 공수창도 회야강과 남창천이 합수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전하고 있는 창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충남 아산의 공세곶창성(貢稅串倉城)이 있으며, 전북 익산의 덕성포창성, 전남 영광의 법성포창성 등 여러 곳에 그 유구가 전하고 있다. 이러한 창성은 세곡의 양(量)에 따라, 크게는 일반 읍성의 규모에서부터 작게는 진보(鎭堡)에 이르며, 입지(立地)도 산정(山頂)에서부터 해안까지 다양하다. 이와 같은 점을 참고해 볼 때, 비옥산성은 임진왜란 이전의 남창지역에 설치한 공수창을 감싸고 있던 창성(倉城)일 가능성이 높다.

울주군 온양읍 남창리에서 고산리의 일부를 거쳐 비옥산 뒤쪽을 오르는 길은 비교적 완만하여 세곡의 운반과 보관이 용이한 편이며, 그 동남쪽의 온양읍 동상리 쪽은 급사면을 이루고 있어 외부의 적이 접근하기 어렵다. 이와 더불어 비옥산성이 위치한 산정이 평지로 넓게 펼쳐져 방어 및 전투용 성곽으로서의 기능을 하기에는 매우 불리한 점 등이 창성의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한편, 비옥산성의 성벽 돌쌓기 수법(축성법)도 주목된다. 성벽은 비교적 다듬은 직사각형에 가까운 돌을 위로 갈수록 안으로 들여쌓았고, 그 사이사이에 주먹정도 크기의 거친돌을 끼워 넣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아산의 공세곶창성의 축성법과도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비옥산성의 운영에 관해서는 읍지 및 지지류(地誌類) 등 고문헌상의 기록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바가 없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제작된 대부분의 고지도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를 볼 때, 비옥산성은 임진왜란 이전에 사용하다가 폐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17년의 <조선지지자료> 울산군 온북면(溫北面)편에는 비옥산성에 대해 ‘뒷성(後城)’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에 성곽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유구만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비옥산성(飛玉山城)의 어원(語源)도 모호한 편인데, 그 이름이 주목을 끄는 것은 앞서 언급한 기장군 공수포(公須浦)의 또 다른 이름이 비옥포(飛玉浦)였다는 점이다. 이는 남창의 공수창과 비옥산성이 서로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비옥(飛玉)의 한자 표기가 ‘기름진 땅’이라는 뜻의 비옥(肥沃)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발음이 같은 한자로 달리 표현하는 사례도 많기 때문에 비옥산성은 ‘곡식이 풍성한 산성’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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