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56)안덕기와 영화관

▲ 매사에 낙천적이었던 안덕기 후보는 울주군 삼남면에 농장을 산 후에도 계속 풍년이 들어 이 돈을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 당시 안 후보 소유였던 농장에는 현재 대형 마트가 들어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자유당의 전례 없는 부정 속에 이루어진 4대 총선에서 울산에서는 갑·을 두 지역 모두 자유당의 안덕기와 김성탁 후보가 당선되었다.

4대 총선은 선거기탁금 제도와 자유·민주 양당의 공천제 영향으로 입후보자가 격감해 울산에서도 갑·을구에서 각각 3명이 출마했다. 후보자는 적었지만 자유당이 호헌을 목표로 전력을 투구해 울산에서도 부정 선거가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따라서 을구에서는 재선거가 치러졌다. 재선거 역시 공정하지 못했다. 을구에서 김성탁 후보와 재선거까지 가 패했던 정해영 후보는 당시 울산의 재선거를 ‘협잡선거’라고 규정했다.

당시 울산 재선거는 전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서울과 부산의 전 언론기관이 총동원되어 현지 상황을 보도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강현 기자를, 부산일보는 서병조 기자를 각각 파견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폭력배의 미행을 피해 밤마다 숙소를 옮겨야 했다. 이런 와중에 서 기자는 취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다 기습 폭행을 당해 입원까지 해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부정 선거를 보다 못해 민주당도 의원을 파견했다. 재선거 참관을 위해 유진산, 양일동, 김응주, 조일제 의원 등 중진급 의원들이 울산에 왔다. 그러나 이들 역시 엄청난 공포 분위기 속에 속수무책이었다.

안덕기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같은 자유당의 관권 선거가 있었다. 풍족한 자금 역시 안 후보 당선에 큰 역할을 했다.

양봉-과수원-제관 사업까지 모두 잘되면서 영남지역 거부로 성장
4대총선서 현금 뿌리고 유권자 트럭 이송, 민주당에 고발당하기도
언양 영화관서 요정정치 펼쳐…4·19 이후 불운 이어져 쓸쓸한 말년

3대 총선에서 400여 표 차이로 김수선 후보에게 패해 정계 진출이 좌절되었던 안 후보에게 4대 총선은 권토중래의 기회로 많은 선거자금을 쏟아 부었다.

경남 의령 출신으로 통도사가 운영했던 보광중학교가 학력의 전부였던 안 후보가 이 선거에서 겁없이 돈을 쓸 수 있을 만큼 부자가 되는 데는 요행이 많았다.

양산 인근 야산에서 양봉을 시작해 떼돈을 벌자 그는 일본인이 경영했던 삼남의 과수원을 인수했다. 과수원 역시 계속된 풍작으로 많은 부를 안겨주었다. 안 후보는 이 돈으로 부산 영도에 있는 동양제관을 사들였는데 이때 6·25가 일어나 깡통의 수요가 급상승하면서 거부가 되었다. 삼남면 옛 그의 과수원 자리에는 현재 대형마트가 들어서 있다.

금권 선거를 하다 보니 후유증도 컸다.

선거 한 달 뒤인 1958년 5월29일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고 있다.

“민주당 경남 도당이 울산 갑구에서 당선된 안덕기씨와 104명의 선거운동원을 검찰에 고발했다. 이들은 고소장에서 울산경찰서가 선거와 관련, 현금을 수령하는 등 선거법을 위반한 사람들을 감싸고 있어 부정선거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면서 이 사건을 검찰에서 조속히 처리해 줄 것을 당부했다. 민주당은 지난 총선에서 안덕기 운동원 최병윤(崔炳允, 북정동)씨가 안씨를 당선시킬 목적으로 동구 유권자들에게 1000~3000원을 뿌렸고 투표 당일에는 대동산업공사 트럭을 동원, 유권자를 이송했고, 운동원 이화우(李和雨)씨가 양사초등학교 뒤뜰에서 이석화(李錫和)씨 등 8명의 여인에게 돈을 주는 것을 확인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돈이 많았던 안씨는 국회의원 당선 후 언양에 오면 당시 고급 요정이었던 영화관에서 당원들을 만났다. 요즘 말로 요정정치를 한 것이다.

자유당 시절 울산에서는 명월관과 영화관 두 곳에서 요정정치가 이루어졌다. 명월관은 흥아관과 함께 일제강점기 옥교동 현 ‘이안태화강엑소디움’ 뒷골목에 있었는데 해방 후에는 유명 요정으로 변신해 자유당 시절 울산의 정당 인사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언양에 있었던 영화관은 당시 안 후보의 부위원장인 유병환씨가 운영했는데 처음에는 동부리에서 술과 밥을 팔았다. 이 집은 3대 총선 때는 오위영 후보의 선거사무실로 운영되기도 했다.

이후 영화관은 구 언양초등학교로 들어가는 언양사거리로 이사해 장사를 했으나 화재로 소실되는 바람에 건너편 한일여객 주차장 골목 안으로 옮겼다.

당시 안 후보가 이 요정에서 만났던 자유당 인물로는 김차오씨가 있다. 안 후보가 당시 을구에서 당선되었던 김성탁 의원으로부터 혼줄이 났던 곳도 이 요정이다.

을구 선거는 김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상대의 정 후보가 선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제소하는 바람에 재선거를 해야 했다.

그런데 이때 경남도당 위원장이었던 안 후보가 자유당의 온건파가 되어 은근히 정 후보를 밀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초선 의원인 안 후보가 도당 위원장이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돈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김성탁 후보가 서울에서 지프를 타고 언양으로 와 영화관을 덮쳤다.

이 때 김 후보가 탄차가 당시 육군대장 이형근의 지프였다고 하니 김 후보의 권세가 얼마나 높았던 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재력과 배경에서 안 후보에 뒤지지 않았던 김 후보는 요정에서 안 후보를 만나자 말자 협박해 재선에서 자신 편이 되도록 만들었다. 당시 안 후보가 얼마나 혼이 났던지 나이로는 안 후보가 김 후보 보다 무려 열살이나 많았지만 이때부터 안 후보와 김 후보가 서로 말을 트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요정은 4·19 때 울산농고 학생들에 의해 불타는 바람에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4·19 때 울산에서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자유당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면서 자유당 관련 건물을 많이 파괴했다.

이 무렵 울산농고 학생들을 선동해 트럭에 태워 언양으로 갔던 인물이 당시 고려대학교 2학년이었던 한희준과 울산농고 축구선수였던 김영찬이었다. 이들은 영화관으로 들어가 먼저 창고에 있던 소갈비를 들고 나와 언양 주민들에게 주었다. 당시 서민들은 소갈비는 냄새도 맡을 수 없었던 시절이라 이를 본 주민들이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때 서울에서도 학생들이 서대문 이기붕 집에 쳐들어갔을 때 냉장고에서 수박이 나오자 흥분해 이씨 집을 불 질렀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는 지독히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이후 한희준씨는 8대 총선에서 박원주 낙선 운동에 앞장서는 ‘동심회’ 조직에도 참여하는 등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동심회’는 8대 총선에서 공화당의 박원주 후보를 낙선키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였다. 당시 울산은 여당인 공화당 선거운동원들이 많았지만 박 후보가 이후락씨 대신 길재호 당시 공화당 사무총장의 힘으로 공천을 받았기 때문에 공화당 운동원들 중에서도 이를 반대하는 청년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이 박 후보의 공천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은 것은 8대 총선에서 박 후보가 당선될 경우 차기 선거에서 울산후보 공천을 두고 이후락씨의 영향력이 떨어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따라서 총선을 앞두고 이들이 공화당을 탈당, 박 후보 낙선 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당시 이 조직에 참여했던 인물로는 공화당 부위원장을 지냈던 남목의 김병식, 한신개발이 운영한 울산~언양 고속버스 소장을 지냈던 김정덕씨가 있다. 신상우 의원의 측근으로 나중에 울산 야당의 중심인물이 되는 김석근씨도 이때 동참했다. 이 때문에 8대 총선에서 결국 박 후보가 낙선하고 의외로 신민당의 최형우 후보가 당선되는데 ‘동심회’에 대해서는 8대 총선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안 후보의 선거 참모로 일했던 김영칠(작고)씨는 “안씨는 낙천주의자로 항상 자신은 요행 속에 살아왔다면서 3대 총선에서 낙선했을 때도 오히려 그가 선거운동원들을 위로 했다”고 회고한다.

한편 4대 총선에서 너무 돈을 많이 뿌렸던 안 후보는 4·19 후 제관회사를 정리해야 했고 이후에는 요행을 잡지 못해 제주도로 간 후 김종필씨가 운영하는 감귤 농장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가 80년대 초반 타계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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