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맺힌 아픈 시절도 역사기 때문이죠
1) 서생포왜성

▲ 서생포왜성은 평지와 산이 이어진 평산성(平山城) 구조로, 임진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騰淸正)에 의해 축성됐다. 외성에서 내성으로 들어가는 내성 1관문 주출입구.

“왜놈들이 만든 왜성을 왜 우리가 돈 들여 보존을 합니까?”

울산시문화재 제8호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을 향해 걷던 초로의 관광객이 던진 질문이었다. 의문형 종결어미로 물었으나 그 질문에는 의문만이 아니라 사뭇 불만이 담겨져 있음을 쉬 짐작할 수 있었다. 올 여름에 제법 움푹하게 패인 가파른 흙길을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걷던 그는 가쁜 숨을 내몰아쉬었다. 폭염이 한풀 꺾였다고는 하나 경사진 길을 따라 왜성을 오르는 데는 제법 굵은 땀방울이 필요했다. 나는 즉답 대신 부처님 닮은 미소를 지었고, 그분을 향해 천천히 대답했다.

“저 역시 처음에는 선생님과 생각이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짧게 물어오셨지만 이제 그 답을 조금 길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임진왜란때 가토 기요마사가 축성
보급 끊긴 왜군 장기전 펼치며 농성
임란 후엔 조선수군 기지로 활용
자재 조달 위해 인근 만호진성 허물고
일반 백성 동원해 성벽 쌓아올려

해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울산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1에 위치한 서생포왜성. 이 성은 평지와 산이 이어져있는 ‘평산성’(平山城) 구조로, 임진왜란 때 구마모토(熊本) 출신의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騰淸正)에 의해 축성됐다고 짐작된다. 이 왜성은 산 정상에 본성을 두고 정상부터 평지까지 3단의 공간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크게는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으로 이뤄져 있다. 외성이 바깥쪽에 돌을 쌓은 ‘내탁식’이라면, 내성은 안과 밖 모두를 돌로 쌓은 ‘협축식’으로 축성돼 견고함이 더해져 있다.

외성이 끝나고 바야흐로 눈앞에는 외성과 내성의 경계지역이면서 외성에서 내성으로 들어가는 내성 1관문 주출입구가 나온다. 400여년이라는 유장한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크게 허물어짐 없이 단단한 모습 그대로를 유지한 채 마치 세월을 건너뛰는 오기라도 부리는 듯 건재함을 드러내고 있다. 서생포왜성 축성에 처음부터 관여했던 기요마사는 외성으로 진입한 공격력을 내성으로 들어오는 이곳 출입구에서 일단 틀어막을 요량으로 입구를 사각형태의 ‘내외옹성형’으로 축조했다. 공격시간을 지연시키는 대신 방어시간을 최대한 벌 수 있도록 설계했다는 것이 이 구조를 통해 한 눈에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 일본 고유의 기술이 적용된 서생포왜성. 모서리를 60도 각도로 비스듬히 큰 장방형의 돌을 교차해서 성벽을 쌓아올렸다.

주출입구를 지나 내성으로 들어와서도 가파른 경사길은 계속 이어진다. 따가운 뙤약볕에 숨이 차오르고,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눈으로 흘러들어 따가움이 느껴진다. 손수건을 찾아 젖은 얼굴을 닦기 위해 제법 평평한 바윗돌 위에 앉으니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바닷바람이다. 멀리 푸른 동해가 마치 손에 잡힐듯 한 눈에 들어온다.

난(亂)이 끝나고 왜구들이 퇴각한 뒤 조선수군기지인 동첨절제사영(同僉節制使營)이 들어섰다. 동첨절제사가 머무는 진(鎭) 아랫마을이었다는 데서 유래한 ‘진하’ 그 진하바닷가가 보인다. 신선이 내려와 놀았다는 설화가 전해지며 바닷길이 열리기도 하는 ‘명선도’도 한눈에 들어온다. 회야강 물줄기가 바다를 향해 바쁠 것 없다는 듯 유유히 흘러들어가는 정경 또한 한편의 파노라마사진처럼 펼쳐진다.

▲ 서생포왜성 정상에서 바라본 진하해변과 명선도.

땀을 식히느라 맞이한 고요한 정적도 잠시. 관광객들의 부산한 움직임이 정상을 향한 발길을 재촉한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밝음에서 어둠으로 밝기의 변화를 나타낸다. 따가운 햇살이 키큰 나무와 잎넓은 수목들에 의해 가려지고 짙푸른 나무그림자가 길을 덮고 있다. 일순 더위가 가시고 시원함을 넘어 청량한 기운마저 느껴질 정도다. 정상에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성벽이 보인다.

서생포왜성의 성벽 형태는 우리나라 성(城)과는 다른 특이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 모서리를 60도 각도로 비스듬히 큰 장방형의 돌을 교차해서 쌓아올리는 일명 ‘산기즈미’(算木積み) 방식으로 일본 성에서 찾을 수 있는 고유의 기술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얼마전 지진으로 일부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고는 하나, 일본 구마모토성에서 서생포왜성보다 정교함이 한층 더해진 성벽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석공의 아들이었다는 기요마사가 전쟁 중에 다급한 마음으로 축조한 성이기는 하나, 오늘날까지 전해져오는 것으로 미뤄 축성기술의 견고함이 세월을 이겨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 마무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창표사’(蒼表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적 20만 대군이 조선 전체를 짓밟는데, 그중 기요마사가 이끈 2만 대군이 부산 기장을 거쳐 충주를 지나 한양까지 올라간 뒤 함경도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 길림성까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진출을 한다.

하지만 국난 시기에 일어난 자발적 충성심은 양반에서 천민까지는 물론이요, 여러 곳에서 의병까지 일으킨다. 그 가운데 고승인 서산대사 휴정(休靜)은 제자들에게 승군을 일으키도록 각 사찰에 격문을 띄웠고 이에 전국에서 승군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의병은 오직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결연히 일어섰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사항쟁의 정신으로 왜란 극복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이 바다를 장악한 뒤 왜군들의 보급로를 끊어 버렸다. 이에 왜군 대부분의 병력이 김해에 집결하게 되고 군수물자를 부산으로 운반하여 동남해안 지역 10곳에 왜성을 축성한 뒤 장기전에 대비한다.

그 시기인 1593년 7월부터 약 10개월가량 서생포에도 왜성이 축조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첫째 가까이에 만호진성(萬戶鎭城)이 있어 축성을 하기 위한 돌을 구하기가 쉬웠고, 둘째 서생포에는 예부터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어 축성에 필요한 인력을 강제동원하는 것도 용이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부근 만호진성을 허물어 그 돌을 옮겨와 성을 쌓았다고 하니, 그 많은 돌을 옮겨오는 일에 어찌 왜군들뿐이었겠는가! 이곳 인근에 살던 일반백성들도 왜구들의 무력에 의해 다수 동원되었음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성벽을 쌓아올린 돌 한 점 한 점, 바윗돌 하나 하나에는 어쩌면 그날 동원된 힘없는 백성들의 땀과 눈물과 피와 한숨이 얼룩져 있는 것 같아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정상이다.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泗溟大師]와 기요마사 간 휴전협상 및 평화교섭이 이 어디쯤에선가 열렸으리라. 당시 사명대사는 자신의 일기와 상소문 등을 기록한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을 통해 ‘높은 누각이 있으며, 또한 멋을 낸 성곽으로 되어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높은 누각도, 멋을 낸 성곽도 오늘날은 보이지 않지만 여기가 ‘천수대’ 그리고 ‘천수각’이 있었던 자리였으리라.

내려오는 길. 어느새 밤이 익어가고 있다. 폭염이 이어지는 기온 탓에 가을을 잠깐 잊어버렸다가 밤나무에 밤송이가 달린 것을 보고서야 가을이 이제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음을 직감했다. 산을 내려오다 보니 눈 아래로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창표사’(蒼表祠)가 그 윤곽을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충신들을 배향하기 위해 세웠던 ‘창표당’(蒼表堂). 그 창표당이 터만 남긴 채 소실되었다가 이제 창표사로 복원되고 있다.

어느새 서생포왜성 초입에서 질문한 관광객의 짧은 질문에 대해, 문화관광해설사로서의 긴 답을 마무리해야할 시간이 되었다.

“서생포왜성은 1963년 1월21일 대한민국 사적 제54호로 지정됐습니다. 이후 일제지정 문화재 재평가로 등급이 조정되면서 1997년 1월1일 사적 지정이 해제되었지요. 그러다 1997년 10월30일 울산시 문화재자료 제8호로 재지정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 홍중표 (전)울산문화관광해설사협의회장 자유기고가

우리가 정작 관심을 갖고 걷어내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일제 잔재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서생포왜성이 갖는 의미는 보이는 것에 우선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민족정신을 어지럽히고 우리 문화를 탁하게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서생포왜성은 보이는 것들을 통해 우리의 현재를 성찰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살펴서 깨끗지 못한 과거의 것들을 청산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 아닐까 왜성을 오르내릴 때마다 헤아려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의 연장선에서 서생포왜성은 우리 조상의 울분과 한이 담긴 치욕의 현장이요, 일본이 조선에 가한 명확한 침략의 역사적 증거물이기에 우리 후손들이 두고두고 이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라도 보존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끝으로 말씀 드리는 것은, ‘아픈 역사도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홍중표 (전)울산문화관광해설사협의회장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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