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산을 이고 사는 사람들(3)배내골표범과 홀갱이꾼

▲ 상북주재소 마당에 공개된 배내골표범 스케치. 표범을 끌어안고 기념촬영을 하거나 수염을 빼간 사람도 있었다. 삽화=곽영화 작가

1944년 동짓달 상북 배내골(梨川). 호랑이 불알도 언다는 칼바람을 가르고 바위산을 오르는 사내가 있었다. 오뉴월 서릿발 눈깔로 짐승을 쫓는 사내는 배내골 홀갱이꾼 이수애비였다. 지난 밤 뒷산에서 자지러지게 울러대던 산짐승 울음소리가 신불산, 재약산을 돌아다니는 점박이 표범의 포효임을 아는 그는 안간힘을 다해 바위산을 올랐다. 그는 간장종지만한 점박이 녀석의 발자국이 찍힌 능선 길을 따라 홀갱이(밀렵 올가미)를 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된비알을 옮겨 다니며 10군데에 홀갱이를 쳤다.

그는 나무와 나무 사이에 둥글게 건 올무 강철선을 아름드리나무에 단단히 묶었다. 멧돼지도 잡을 수 있는 강한 강철선이라도 단단히 고정하지 않으면 힘센 녀석은 나무째 뽑아내고 달아났다. 그는 ‘토끼똥구멍닦게’라는 억센 풀을 감아 강철선을 위장했다. 워낙 예민한 짐승이라 강철선에서 부시는 빛도 알아차렸다. 웬만한 홀갱이꾼도 타기 어려운 된비알에 범틀 설치를 마친 그는 며칠 전에 놓아두었던 찌개틀(목매)과 투방이(투망의 일종)에 걸린 짐승이 있는지 확인차 주암계곡으로 들어갔다. 움막에서 숯을 굽던 숯쟁이들이 범을 쫓는 이수애비를 검댕이 얼굴로 쳐다보았다. 몇 달을 산에서 사는 숯쟁이들이나 약초꾼, 홀갱이꾼들은 사자평 도자기꾼들의 후예이거나 아니면 호랑이를 잡던 조선 착호갑사 출신의 후손들이 많았다.

서릿발같은 눈으로 짐승 쫓던 배내골 홀갱이꾼 이수애비
보통사람이면 엄두도 못낼 담력으로 바위산에 틀 놓고다녀
천신만고 끝에 잡은 범, 불법밀렵으로 뺏기고 벌금까지 물어
평생 못푼 억울함 ‘자신이 잡은 범과 합성사진’으로 달래

 

 

보통사람들은 노루나 토끼를 잡는 찌개틀이나 투방이를 썼지만 야산에서 단련된 이수애비는 대형 범틀을 놓았다. 범틀은 작은 짐승을 잡는 홀치기와는 달리 가늘고 강한 강철선을 써야 했고, 예민한 녀석이 다닐만한 길목도 잘 골라야 했다. 그렇게 지나갈만한 길목에 범틀을 놓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나타났다. 범틀을 놓는다고 다 잡히는 건 아니었다. 영악한 점박이 녀석과는 머리싸움이었다. ‘녀석은 꼭 사람이 싫어하는 길을 택해. 녀석을 따라 붙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니깐.’

홀갱이꾼 이수아비는 담력이 좋은 사내로 호가 난 인물이었다. 보통사람이면 겁이 나서 가질 못하는 주암골짝을 대범하게 혼자서 틀을 놓고 다녔다. 그가 담력이 커지게 된 것은 상북 천석꾼 김재한 포수의 몰이꾼 일을 해왔던 덕이다. 죽창을 든 몰이꾼들은 산 아래에서 고함을 치며 짐승을 몰았고, 짐승이 올라올 길목에 잠복해 있던 포수는 사격을 했다. 돼지몰이는 8부 능선, 사리나무를 좋아하는 토끼는 9부 능선까지 몰았다. 그렇게 잡은 육장(肉醬) 맛은 독특했다. 사냥감으로 잡은 멧돼지, 노루, 토끼 같은 짐승 고기를 소금에 절여 장독에 재어두면 산골 겨울양식이 되었다.

 

그동안 이수애비는 점박이를 끈기 있게 추적해 왔었다. 점박이 녀석은 오래전부터 신불산과 사자평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산속에서 우는 짐승 소리만 들어도 녀석임을 알 수 있었고, 길섶에 함부로 버려진 똥을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점박이 녀석의 똥에는 짐승 털과 억센 풀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감각이 뛰어난 녀석은 수십 년을 노려도 잡히질 않았다. ‘저 놈이 얼마인데…. 배내골을 드나드는 모피상에게 점박이 가죽을 넘기는 날이면 횡재 하는 거야.’ 그렇다고 변변치 못한 주제에 논 몇마지기를 주고 사야 하는 총을 구할 형편도 못되었다.

범틀을 놓고 난 며칠 후, 동네 개가 짓는 걸 멈추었다. 어젯밤 뒷산에서 자지러지던 괴성이 평소에 듣던 산짐승울음과 다른 것을 직감한 이수애비는 아침밥을 서둘러 먹고 바위산 골짝으로 향했다. 자지러지는 괴성이 들리던 곳은 주암계곡 물가였다. 이수애비는 바위 뒤에 숨어 괴성이 들리는 주변을 살폈다. 청이끼 바위 뒤, 온몸에 검은 점이 박힌 점박이 표범이 홀갱이에 걸려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강철선 올가미에 연결된 나무를 끌고 산을 내려오느라 기진맥진해진 녀석은 물가 가까이에 까지 와서 쓰러진 것 같았다. 이수애비를 발견한 녀석은 화덕 같은 눈깔로 덮칠 듯 괴성을 질렀다. 하지만 녀석이 발버둥 칠수록 강철 올가미는 더 죄어들었다.

▲ 배내골표범과 이수업씨. 이씨는 일제 순사주재소에서 압수를 당하자 뒤늦게라도 자신이 잡은 표범임을 입증하기 위해 이 합성사진을 남겼다. 사진=영남알프스학교 제공

이수애비가 부리나케 쫓아간 곳은 양등 김포수 댁이었다. 몰이꾼 이수애비의 자초지종을 경청하던 김재한 포수는 “옳거니” 하며 아들 해동에게 총을 건넸다. 김포수 부자는 상북주재소에 수렵이 등록된 유일한 포수였다. 총을 맞고 숨이 끊어진 표범은 이수애비 집으로 옮겨졌다. 사단은 이후부터 벌어졌다. 고기가 그리운 배내골 사람들 너나없이 이곳저곳에 몰래 목매를 놓았는데, 이번에 잡힌 홀갱이 임자가 서로 자기 것이라는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배내골 이수아비의 강철선으로 밝혀지면서 일단락되는가 싶던 사단은 갈수록 더 커졌다. 산에 사는 숯쟁이가 황소만한 호랑이를 잡았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먼저 기별이 온 곳은 양산 부자였다. 값은 얼마든지 쳐줄 테니 귀하디귀한 호골을 팔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엔 짐승 털가죽을 사고파는 부산 모피상이 소리 소문 없이 들어왔다. 족제비 낯짝을 가진 모피상은 팔지 않으면 순사주재소에 신고를 하겠다는 으름장까지 놓고 갔다.

배내골에 살았던 이정희(88) 할머니는 그때 사단을 엊그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열댓 살인가 그랬심더. 멧돼지 잡으려고 놓은 올무에 생각지도 않은 범이 안 걸린덩교. 범 잡은 그 냥반 범을 지게에 짊어지고 대밭마(죽전마을)로 내려가면서 이천학교 앞에 내려놓고 구경시키더만요. 이천학교 선생도 나오고 동네구경꾼 다 모였심더. 어린 난 겁이 나서 가까이 못 가고 몰래 숨어보니 살아 있는 범 같았심더.”

▲ 침처럼 생긴 호랑이수염은 안테나 노릇을 하는 중요한 감각기관이다. 조선시대 벼슬아치 모자(戰笠)에는 반드시 호랑이수염으로 장식했다. 출처=가회민속박물관

한편 이수애비와 한 마을에 살았던 이춘우(86)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배내골 계곡 500m 짬에서 잡혔을김더. 억새집 처마 밑에 달아놓은 범을 봤는데 꼬리가 땅에 닿는 암놈이었심더. 이수아잰 지서에 잡혀가 불법 홀갱이로 혼이 났지.”

양산 부자에게 표범을 넘기기로 한 날, 어떻게 알았던지 순사주재소에서 출두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순사주재소는 상북면 산전리에 있었다. 주재소엔 지서장과 왜놈 순사가 두 명, 조선인 순사보, 급사 노릇을 하던 서기 한 명이 근무했다. 잡혀가면 피를 한 말씩 짜낸다는 살벌한 곳이었다. 겁을 먹은 촌로 이수애비는 목도꾼을 불러 점박이 표범을 싣고 출두를 하였다. 배내고개를 넘어 석남사, 궁근정, 황정자를 지나 상북주재소에 도착하였다. 주재소 앞마당에는 호랑이 구경을 나온 흰옷 백성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 배성동 소설가

이수애비는 불법밀렵 혐의로 울산경찰서에 압송되었다. 총질을 한 김해동 포수를 비롯한 지역 유력인사들은 주재소 앞마당에서 살아있는 표범처럼 꾸며 기념촬영을 하였다. 이후 울산경찰서로 넘겨진 표범의 행방을 아는 이는 없었다. 상북 진천에 사는 김정두씨는 그때 상북주재소 마당에 있던 점박이 표범을 목격한 장본인이다. 거기다 녀석의 수염까지 뽑았다. “호랑이 눈썹을 지니고 다니면 감기 안 걸린다고 해서 거적때기에 덮인 호랑이 눈썹을 빼 소장수 나갈 땐 지니고 다녔다”고 했다.

나는 점박이 표범이 잡혔던 배내골 주계덤을 찾아보기로 했다. 하늘이 막혀 어두컴컴한 주암계곡을 열자 싸늘한 냉기부터 흐르는 암곡(岩谷)이었다. 나는 밥주걱 같이 휜 주계덤 바위산을 기듯이 올랐다. 회오리바람이 모이는 바위산 알머리에 올라서자 첩첩산중에서 물밀듯 밀려오는 솔바람이 쏴아 쏴아 춤을 추며 흘린 구슬땀을 거두어갔다. 멀리 신불산과 배내고개 그리고 사자평, 주암계곡, 시루곡, 철구소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 일대는 바위와 나무를 좋아하는 맹수가 한방에 덮치기 좋은 조건이었다. 오매불망, 나는 행여 은둔의 제왕을 만날 수 있을까하는 기대감으로 재약산 산 주름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지만 멧돼지나 노루 따위의 자질구레한 발자국들만 눈에 띄었다.

산에서 내려온 나는 이수애비의 후손들을 수소문해 보았다. 배내골에 살던 이수애비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도외지로 시집 간 그의 딸을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수렵증 있는 그 양반을 찾아갔을 땐 서로 묵인해주기로 했던 거 아임미꺼. 그래놓고 주재소에서 잡아가, 잡아가, 호피 뺏고 벌금까지 물렸다 카이요. 이 사진은 늘 억울해하던 우리 아버지가 합성해 찍은 겁니더. 끝까지 자신이 잡은 범이었음을 입증하려 한거죠.” 스무 살 전에 보지 못하면 죽기 전엔 볼 수 없다는 범. 범을 쫓아 다녔던 배내골 범부는 자신이 죽기 전에 사진을 남기려 했던 것이다. 호사유피 범부사유사(虎死留皮 凡夫死留寫).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범부는 죽어 사진을 남겼다.   배성동 소설가
*영남알프스학교 다음산행 9월3일(토) 청수골 신평장길 문의 010·3454·7853(교무팀장),
(http://cafe.naver.com/ynalpsschool)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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