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동군·서군 편가르기와 서군승리 기원의 의미

▲ 시계탑사거리 학성로 일원에서 해마다 펼쳐지는 울산마두희축제. 사진은 지난해 10월 열린 마두희 줄다리기 행사.

사상 최대에 버금가는 더위가 이제 한고비 넘긴 듯 습도가 가신 바람이 시원하게 얼굴을 스친다. 9월 중순의 추석이 지나고 나면, 가을의 끝을 향해가는 10월15일 전후에 울산 중구의 중심가에서는 굵고 긴 줄을 잡고 안간힘을 쓰는 마두희(馬頭戱)의 함성이 울려 퍼질 것이다. 2012년부터 시작된 마두희 줄다리기는 올해로 5회를 맞이하고 있으며, ‘차 없는 거리축제’가 ‘울산중구문화거리축제’로 변한 뒤 ‘마두희축제’로 자리 잡게 한 일등공신이다. 그동안의 조사와 연구를 통해 축적된 마두희의 새로운 면모를 상, 하 2차례에 걸쳐 정리해 본다.

말머리 같이 생긴 동대산의 줄기
동해로 들어가지 않도록
줄에 매어 서쪽으로 돌린다는 의미

동군은 동해의 적, 서군은 울산 상징
‘서군 이기면 풍년든다’는 속설로
항상 서군이 이기는 구도로 판짜
승부보다는 풍년·무사안녕 기원

마두희(馬頭戱)는 예로부터 울산에서 전승되어온 대표적인 줄다리기 놀이의 이름이다. 이를 한자(漢字)의 뜻으로만 풀어보면 ‘말 머리 놀이(馬頭戱)’가 되는데, 이와 관련된 옛 문헌의 기록은 울산읍지인 <학성지(鶴城誌, 1749년 편찬)>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이후의 여러 읍지에도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학성지>의 마두희 부분을 요약하면 ‘매년 단오(端午)날에 병영과 울산부의 주민들에게 칡을 꼬아 줄을 여러 개 준비하게 하고 줄다리기 당일 종루(울산객사 태화루) 앞길에 모이도록 하여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어 각각의 큰 줄을 만든다. 만든 줄을 서로 연결하여 동편과 서편이 나누어 끌어당기는데, 끌려가지 않고 버티는 쪽이 이기게 된다. 줄다리기를 마친 뒤에는 줄을 태화강의 사공에게 주어 배를 매는 말뚝과 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마두(馬頭)라는 것은 동대산(東大山)의 한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간 모양이 말머리(馬頭)와 같은데, 그 산이 서쪽으로 돌아보지 않아 싫어하여 고을 사람들이 줄로 그것을 끌어당김으로써 놀이를 삼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서편이 이기면 풍년, 동편이 이기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는 내용이다.

우리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전통 줄다리기는 관(官)에서 주관해왔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통 민속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처럼 전통 줄다리기의 하나인 마두희도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민속적 측면에서 연구가 진행되었고, 지난 2015년 12월에 ‘마두희 고증 및 활성화방안 연구’까지 진행되는 등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그 주요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마두희의 유래는 여러 지역의 사례를 참고해 볼 때 고려건국 전후시기와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승(戰勝)의 기념 또는 군사전략의 일환으로 행해졌을 수도 있고,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마을과 고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비보설(裨補說)과 관련하여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학성지>의 내용을 근거로 조선시대에는 병영과 울산도호부가 함께 참여하는 행사였다가 근대기로 접어들며 병영과 울산이 각각 나누어 줄다리기를 했으며, 그 시기도 음력 5월 단오(端午)로부터 음력 정월 보름 및 하절기, 추석전후 등 다양하게 변했다고 한다. 한편, 근대기에 마두희 줄다리를 목격했던 어르신들과의 면담을 통해 줄다리기 행사의 구체적인 방법과 줄의 모습을 찾아낸 것은 크나큰 연구 업적이자 수확 중의 하나라고 사료된다.

이러한 기존 연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필자가 살펴 본 마두희는 다른 지역의 줄다리기와 구별되는 성곽도시 울산만의 몇 가지 특징이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먼저 ‘마두희’의 기장 기본적인 목적이 주목된다. 즉 <학성지>에서 마두희라고 이름 붙인 이유에 대해 동대산의 줄기가 말머리 같이 생겼는데, 그 산이 동해(東海)로 들어갈듯 하여 줄에 매어 서쪽으로 돌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두희는 ‘말머리를 당겨 돌리는 줄다리기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성곽도시 울산’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울산사람 즉 조선시대 당시 울산도호부(군)의 입장에서 볼 때, 울산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여러 포구에 진을 치고 있던 수군성, 병마절도사가 머문 경상좌도병영성, 심지어 국가에 필요한 말을 기르던 남목마성(방어진목장)까지 모두 고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쪽의 산이 바다로 힘없이 들어가 버리면, 실질적으로 동해에 대해 울산이 열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리고 동해로부터 왜적 등 숱한 바다의 적들이 침범해 왔음을 떠올리면 바다는 군사적으로 매우 큰 경계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울산의 주산(主山)인 동대산과 그 자락인 말머리 모양의 산이 서쪽으로 고개를 돌려 울산고을을 든든하게 막아주기를 바랐을 것이며, 마두희(馬頭戱)의 줄다리기 행위는 크나큰 병화를 겪고 이겨낸 울산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을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번에 새롭게 찾은 고문헌의 자료를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1735년부터 38년 까지 울산도호부사를 역임하고 <학성지>를 편찬했던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1679~1759) 본인의 일기인 <청대일기(淸臺日記)>에는 영조 12년(1736) 단오(端午)날에 마두희 줄다리기를 목격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오후에 비가 왔다. 이 고을(울산)의 오랜 전통이 있는데, 그 이름이 마두도을(馬頭徒乙)이다. 호장(戶長)이 기일에 되기 전에 부근의 각 면에서 짚과 칡넝쿨을 거두어 합쳐 도을(徒乙)을 만든다. 행사 날에 동서로 나눈 다음 서로 끌어당겨 승부를 겨루고, 행사를 마친 뒤 태화강 나룻배의 닻줄로 사용하게 한다(午後雨 此邑古規 名以馬頭徒乙 戶長前期收合蒿葛於附近各面 作徒乙 是日分東西 牽引以角勝負 因爲太和津船纜索)’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울산의 대표적인 줄다리기 이름은 ‘마두희(馬頭戱)’였다. 하지만, <청대일기>에는 ‘마두도을(馬頭徒乙)’이라 하여 ‘말머리(馬頭)’까지는 이름이 동일하지만, ‘희(戱, 놀이)’와 차이를 보이는 ‘도을(徒乙)’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도을’의 한자를 풀어보면, ‘무리 새’라는 말이 되며, ‘마두도을’ 전체는 ‘말 머리 무리 새’라고 풀이되어 뜻이 이상하게 된다.

‘마두도을’에 사용된 ‘을(乙)’자는 여러 뜻으로 풀이되기도 하지만, 한자의 발음과 합쳐져 받침으로 사용되는 사례도 많다. 이를 국자(國字)로 쓰이는 경우라고 한다. ‘클 거(巨)’에 ‘을(乙)’을 붙어 ‘걸어둘 걸(乬)’로 부르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마두희’처럼 민간에 전하는 이름을 한자로 표현할 경우 그 뜻과는 무관하게 발음만 빌려오는 사례도 있다. 따라서 ‘도을(徒乙)’은 ‘돌’이라고 읽고 ‘마두도을(馬頭徒乙)’은 ‘말 머리 돌리기’로 해석이 가능하다. ‘마두희’와 ‘마두도을’은 궁극적으로 같은 이름이다. 즉 ‘마두희’는 ‘놀이’를, ‘마두도을’은 줄을 당겨 말머리를 ‘돌리는 것’의 기본적 목적을 중요하게 여긴 것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다음으로, ‘마두희(馬頭戱)’의 ‘편 가르기’와 ‘줄다리기 승부의 결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성지>를 비롯한 근대이전의 여러 <울산읍지>에는 동쪽 편(이하 동군)을 병영과 그 주변 마을, 서쪽 편(이하 서군)을 울산읍치와 그 주변마을로 편성했음을 볼 수 있으며, 줄다리기 승부 결과는 항상 서쪽편이 이겨 ‘이긴 편이 풍년이 든다’는 속설로 귀결되게 하였다. 대부분의 승부는 치열하게 겨루어 객관적인 결과를 이끌어 내는데, ‘마두희’는 왜 항상 서군이 이기는 구도일까? 이를 두고 승부를 겨루는 경기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서의 동군은 병영과 그 주변 마을로 편제되어 병영, 즉 군대를 상징하고, 서군은 울산읍치인 현재의 중앙동 중심으로 편제되어 울산도호부를 상징하고 있다. 이를 승부결과에 대입해 보면, 울산을 호위하고 지키는 군대를 대표하는 병영에 각종 군역(軍役)과 부역(負役, 조세(租稅) 포함)을 담당하는 울산도호부의 서군이 이겨 풍년이 들어야만 울산고을과 국가의 무사안녕을 기원할 수 있다는 당시의 사회·정치구도가 그대로 반영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보다 넓게 보면, 마두희 줄다리기를 통해 울산고을 사람들이 한자리에 만나 풍년과 무사기원을 함께 도모하는 화합의 기회로 삼으려했고, 승부의 결과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음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울산의 젖줄인 태화강의 ‘태화(太和, 크게 화합)’ 정신과도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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