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57)정해영과 김성탁

▲ 정해영 후보(오른편)가 1986년 3월 부산진 지구당에서 개최된 개헌 부산시지부 결성대회에서 김영삼 당시 신민당 고문과 함께 현판식을 갖고 있다.

1958년 치러진 제4대 총선 울산 을구에서는 민주당 김택천, 자유당의 김성탁, 무소속의 정해영 후보가 출마했지만 이중 김택천 후보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이 선거에서 정해영과 김성탁 후보의 싸움은 단지 누가 국회의원이 되느냐는 정치적 싸움이 아니었다. 울산 출신으로 국내 연탄업계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었던 이들은 선거 전부터 피할 수 없는 악연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두 후보 모두에게 이 선거는 사업자체의 흥망이 걸려 있어 양보할 수 없는 한판이었다.

이 때문에 두 후보는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고 이것도 모자라 전국 깡패를 동원해 공포의 선거전을 울산에서 벌였다.

특히 자유당은 이 선거에서 김성탁 후보를 돕기 위해 창원 출신의 이용범 의원이 이끌었던 깡패단을 파견해 울산을 무법천지로 만들었다. 이 의원은 이병주씨의 소설 <산하>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그는 자유당 시절 건설업을 통해 돈을 많이 벌어 자유당 재정위원장직을 맡는 등 정경유착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자유당 시절 그는 울산 삼호교도 건설했다. 당초 설계에는 삼호교에 인도를 설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공사를 하면서 인도를 만들지 않고 남은 돈을 자유당 운영비로 내어 놓았다. 이 때문에 공사가 끝난 후 인도가 없는 이 다리를 울산 사람들은 ‘이용범 다리’라 불렀다.

제4대 총선, 울산 을구서
자유당 김성탁-무소속 정해영
양 사업체 흥망 걸고 맞대결
각각 옥양목·광목 옷 선물하고
정치깡패 불러 공포 분위기 조성
주민들도 두편으로 갈려 반목

4대 총선에서 이용범의 울산 활동은 정해영 후보의 회고록에 잘 나타나 있다.

“선거가 시작되자 창원 을구에서 무투표 당선되었던 이용범 의원이 부산진의 ‘번개파’란 폭력배를 이끌고 울산으로 왔고, 영천 갑구에서 역시 무투표 당선되었던 김상도 의원이 정치 깡패인 동생 김종태와 김종하를 선봉장으로 하는 대구 ‘팔공산부대’라는 폭력배를 이끌고 나의 선거구에 쳐들어 왔다. 이렇게 되자 울산 을구에는 70~80명의 정치 깡패들이 들끓었다.”

김종태는 5·16후 통혁당 간첩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처형된다.

당시 선거가 얼마나 살벌했던가 하는 것은 4대 총선 동안 이들이 동원한 깡패들이 울산에서 밤마다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시민들이 밤길을 다닐 수 없었다는데서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당시 선거분위기는 경찰이 다스릴 수 없는 무법 천지였다.

전국씨름대회에서 천하장사를 3번이나 해 ‘장군’으로 불리었던 우성렬(禹成烈)씨가 병영에서 김종태씨의 권총에 맞아 턱이 날아갔던 때가 이 무렵이다. 정 후보 선거운동원으로 병영에서 연탄하치장을 운영하고 있었던 우씨는 나중에 법정에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증언하게 되는데 이때 말을 못해 서면으로 진술했다.

당시 울산선거가 얼마나 부정선거였고 깡패들이 얼마나 설쳤는지는 통혁당 사건으로 김종태씨와 함께 사형당한 그의 조카 김찬락(金瓚洛)씨의 수기에서도 알 수 있다. 김씨는 사형선고를 받은 후 옥중생활을 하는 동안 ‘어느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수기를 남겼는데 그 속에는 4대 총선의 울산 선거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

“통일혁명당 사건 못지않게 삼촌(김종태)이 우리 집안과 그 자신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준 것은 4대 총선에서 악명 높았던 울산 을구 부정선거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용감한 3형제’라는 악명으로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은 바 있는 세칭 울산 을구 부정선거에서 그는 실질적인 총 지휘자였다.

그가 당시 자유당 공천을 받았던 김성탁을 위해 선거유세를 비롯해 폭력행위 등 갖은 부정한 수법을 동원해 정해영씨를 낙선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였던 것은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사건은 결국 선거 일부가 무효가 되어 재선거의 결과를 가져왔고 그 자신은 형사 피고인으로 선고유예를 받고 국회의원 비서직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돈 봉투가 공공연히 나돌고 엄청난 폭력이 난무했던 이 선거는 결국 1차 투표에서 패한 정 후보의 제소로 온산면 등 일부 지역에서 재선거를 하게 된다.

선거자금 역시 엄청나게 뿌려져 당시 울산시민들이 입고 다니는 옷 중 하얀 옥양목 두루마기는 김 후보가 준 것이고 누런 광목 바지저고리는 정 후보가 선물한 것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이에 대해 김성탁 후보는 90년대 말 필자와 만나 이 선거를 회상하면서 “울산에 와 보니 정해영 후보가 먼저 대구에서 광목을 사와 바지저고리를 만들어 돌렸기 때문에 내가 부산으로 가 범일동 조선방직에서 옥양목을 가득 차에 싣고 와 선거운동원들에게 주었다”과 말했다.

정후보는 이 선거가 얼마나 힘들었던지 2001년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 중 많은 부분을 이 선거의 부정을 알리는데 할애했다.

그는 ‘부패 권력과의 대결’이라는 제목아래 당시 부정선거를 저지른 자유당을 비난하고 이에 편승해 자신을 괴롭힌 김 후보의 행동을 질타하고 있다.

두 후보는 성격에도 차이가 많았다. 정 후보가 치밀하고 계획적이어서 실수가 없었던데 반해 김 후보는 약점이 많았지만 호탕하면서도 남을 배려하는 인간성을 갖고 있었다.

이런 둘의 성격은 사회활동에서도 잘 나타난다. 정 후보는 당시 사재를 털어 서울에 ‘동천학사’를 지어 울산 출신 대학생들에게 식비만 받고 숙소를 제공했다. 반면 김 후보는 신설동에 2000여 평의 해병대 사령관 사택을 구입한 후 서울에 오는 울산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잠자리를 제공했다.

특히 김 후보는 울산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 온 사람들에게도 밥 주고 옷 주고 심지어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에 취직까지 시켜주었다. 이러다보니 한 때 김 후보 집은 울산 출신 룸펜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선거에서 정작 도움을 받은 사람은 정 후보였다. 4대 총선 때 정 후보의 경우 최형우 의원을 제외한 동천학사 학생들이 대부분 울산으로 와 정 후보를 도왔다. 그러나 김 후보의 경우 자신의 집 문턱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사람들 중 그를 도운 사람이 없었다. 최 의원은 4대 총선에서 김택천 후보를 지지하는 바람에 동천학사 출신 학생들의 미움을 쌌다.

아무튼 용호상박 전을 벌였던 을구 선거는 폭력과 금권의 타락 선거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당시 선거에서 김 후보가 이용범 의원과 김상도 의원의 지원 속에 깡패를 동원한데 반해 정 후보 역시 이에 뒤지지 않고 부산과 대구에서 건달들을 불러들여 맞섰지만 김 후보의 세를 꺾지 못했다.

불과 2년 뒤 4·19가 일어나 자유당이 몰락할 것을 예견하지 못하고 필사 전을 펼쳤던 이 선거는 을구 주민들의 인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후보들이 이렇게 결사적인 선거를 하다 보니 주민들 역시 두 편으로 갈려 지지하는 후보들을 두고 반목이 심했다.

김성탁 후보의 경우 정 후보를 의식해 선거에서 자신의 세를 너무 과시한 것이 결국은 그를 파멸로 이끌고 말았다.

김 후보의 경우 국회의원 당선 후 서울에서 울산에 올 때면 열차로 부산에서 내려 지프를 타고 울산으로 왔는데 이때 항상 경남도경국장이 웅촌까지 와 환영했다. 김 후보는 4·19와 함께 부정선거의 원흉으로 몰려 돈도 권력도 모두 잃었다. 그러나 정치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그는 민주당 시절에 치러진 5대 선거에 다시 출마한다. 이 선거에서 비록 당선권에는 들지 못했지만 자유당 조직을 재정비해 무려 8500여 표를 얻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더욱이 그는 공화당 시절 벌어진 6대 총선에서는 공화당 후보로 다시 출마하지만 울산시민들이 외면하는 바람에 국회에 발을 들여 놓지 못했다. 이후 7대 총선에서 중도 포기한 그는 영영 정치낭인이 되고 만다.실제로 울산 정치사에서 김성탁 후보처럼 갑자기 떼돈을 벌고 또 이 돈을 한꺼번에 선거에 쏟아 부어 망한 인물을 발견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파란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래 살았다. 90년대 중반까지 살면서 말년을 서울에서 외롭게 보냈던 그는 타계 후 울산 강동에서 수목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이에 반해 4대 총선에서 낙선한 정 후보는 5대 총선에서는 울산에서 당선돼 민주당 시절 윤보선 대통령의 일급 참모가 되고 이후 야당을 대표하는 7선의원이 된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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