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백두대간 제24구간-(추풍령~황악산~우두령)
거리 22.7㎞, 시간 9시간5분...산행일자 : 2016년 5월8일

▲ 추풍령에 오월이 화창하다. 추풍령에서 부는 바람은 영혼까지도 간질이는 춘풍(春風)이다. 대자연의 왕성한 기운이 산꾼들과 함께 산정을 향해 거슬러 오르고 있다.

산이 오월의 창을 활짝 열었다. 빛 고운 연두색 새 옷을 입고 영롱한 이슬과 낭랑한 새소리로 산이 깨어났다. 햇살이 내려앉은 꽃잎은 깨끗이 세안을 한 얼굴로 산을 수놓았다. 아카시아 향기는 바람을 따라 천지사방으로 흩날리면서 허기진 사람의 속을 채워준다.

오관(五官)을 모두 열었다. 잠시 내려놓게, 잠시 벗어나게, 잠시 잊어버리게 무량한 산이 맞아준다. 능선과 능선을 이어주는 호젓한 오솔길에서, 거친 호흡을 토해내고 땀을 헌상하는 오름길에서, 눈을 꼭 감았어도 무연히 돌아봐지는 산정에서 내가 길섶에 핀 꽃잎이 되고, 내가 최후에 남을 산새가 되고, 내가 능선을 넘어가는 바람이 된다. 오월의 산, 그 활짝 열린 창으로 들어가서 내가 나로 깨어난다.

낙방한단 속설에 먼 괘방령 넘어갔지만
현재 괘방령은 한적한 고갯마루로 격하
이어진 황악산은 직지사 품고 산꾼 반겨
고산의 풍모 갖추고도 편한 발길 이어줘

출발지 추풍령(秋風嶺)의 아침이 맑다. 추풍령에서 부는 바람은 추풍(秋風)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간질이는 춘풍(春風)이다. 싱그럽게 자란 풀잎 끝마다 영롱한 이슬이 보석처럼 성글어 있어 무심히 밟고 지나갈 수가 없다. 현대사에서 가장 분주한 고개, 추풍령에도 오월이 화창하다.

▲ 웃고 있는 꽃잎이 사람의 마음에 곱게 꽃물로 번져온다. 물망초와 꽃이 너무도 닮은 덩굴꽃마리.

산 속에는 신록의 풀내음이 가득하고 볕이 들지 않는 곳에도 새잎들은 맑은 빛을 내뿜고 있다. 억제할 수 없는 대자연의 왕성한 기운이 산꾼들과 함께 산정을 향해 거슬러 오르고 있는 것이다. 장대한 백두대간이 한반도의 중원에 해당하는 추풍령을 향해오면서 지세를 낮추었다가 다시 기개를 떨치며 일어서는데 해발 743m 눌의산 오름이 제법 옹골지다.

눌의산(訥誼山·743m)에서 장군봉(長君峰·606m)을 거쳐 가성산(柯城山·715m)에 이르는 산길은 하늘을 찌르는 참나무 군락이 도열을 해 있고 등로는 대체로 완만하다. 산이 거칠지 않으니 조망은 없다. 가끔씩 시야를 열어주는 바람자리가 있어야 잠시 숨을 돌리고 쉬어들 가는데, 숲속 오솔길을 물 흐르듯이 대원들은 쉬지 않고 흘러간다.

 

산행 초입부터 몸상태가 좋지 않은데도 무리하게 대오를 따르려다 힘에 부쳐 하는 대원이 발생했다. 하지만 몇몇 대원들의 유기적인 협력으로 극복을 해 가고 있다. 개인산행이라면 자신의 컨디션에 맞춰 산행을 이어가면 된다. 그러나 단체산행에서는 전체 일정을 무시할 수가 없어 대오를 따라가려다 과부하에 걸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것이다. 다행히 약 처방을 하고 대원들의 협력과 동료애로 끝까지 동행을 할 수 있었다. 장거리 단체종주 산행에서 체력 난조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정도로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추풍령에서 황악산(黃嶽山·1111m)으로 가는 길에는 경북 김천 대항면과 충북 영동 매곡면을 이어주는 오래된 고갯길 괘방령(掛榜嶺)이 나온다. 일설에 의하면 영남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갈 때 길이 가까운 추풍령을 버리고 괘방령을 넘어갔다고 한다. 사연인즉슨 추풍령을 넘으면 말 그대로 가을 낙엽처럼 우수수 낙방을 한다 하여 길이 좀 멀더라도 괘방령을 넘어 과거시험을 보러갔다는 이야기다. 현재의 개념으로 906번 지방도에 속하는 괘방령은 지난 세월 영화는 모두 전설이 됐고, 뜸하게 자동차만 지나다니는 한적한 고갯마루가 됐다. 선두 그룹은 괘방령을 통과해 황악산 오름을 시작했고 후미 그룹은 괘방령에서 식사와 함께 넉넉히 쉬어서 간다.

괘방령의 해발고도는 300m 정도. 그렇게 넓지 않은 구릉지로 돼있다. 황악산으로 오르면서 돌아보면 가성산 방향으로 목가적인 시야가 열리는 곳이다. 이윽고 황악산 오름에서 살짝 솟아있는 여시골산과 운수봉이란 표석이 있는 지점을 거쳐 가는데 산정이라기보다는 황악산 오름에 붙어있는 요충지 정도이다. 굳이 ‘산이다. 봉이다’라고 표석까지 올려야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황악산은 대가람 직지사(直指寺)를 품고 있다.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파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의 첫 사찰로 알려진 경북 구미시 해평면의 도리사(桃李寺)를 창건한 후,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바라보면서 ‘저 곳에 절을 지으라’고 손가락질을 한 곳에 절을 지은 뒤 직지사라 불렀다는 설이 있는 곳이다. 우리 땅은 대가람이 자리를 잡은 곳 모두가 좋은 지기(地氣)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황악산정의 표석 뒷면에도 ‘황악산 정상에 오르면 하는 일들이 거침없이 성공하는 길상지지(吉祥之地)의 산이다’라고 주석까지 달아놓았다. 그래서일까? 황악산과 직지사가 여느 산과 가람보다 잘 어우러진 곳이란 느낌이 들었다.

먼저 산정에 오른 대원들이 후미 대원들이 오기를 기다려 산정의 좋은 기운을 함께 나눴다. 참 좋은 계절에 황악산에 든 탓인지 산의 품이 더할 나위 없이 좋게만 느껴진다.

황악의 능선은 부드럽고 부드러운 능선에는 봄이 찬란하다. 해발 810m의 황악산 바람재는 이름에 걸맞게 사시사철 바람이 들고나는 요충지이고 너그러운 산은 해발이 높은 바람재에 이르도록 사람들이 기대어 살 수 있게 터를 내어놓았다. 바람재에까지 임도가 나 있고 농장이 구릉지를 따라 펼쳐져 있다. 바람재를 지키고 있는 표석은 예나 지금이나 바람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바람이 전하는 얘기들을 모아 두었다가 지나가는 산꾼들에게 전해주려는 모습이다. 바람재를 그저 지나칠 수 없어 대원들 모두 무장해제를 하고 불어오는 바람에 몸들을 맡긴다. 바람을 쐬는 대원들의 표정이 바람을 따라 훨훨 날아갈 것처럼 보인다.

▲ 경북 김천 대항면과 충북 영동 매곡면을 이어주는 괘방령. 영남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갈 때 길이 가까운 추풍령 대신 이 고갯길을 넘어갔다고 전한다.

오월의 햇볕은 유난히 맑고, 감미롭게 산을 타고내리고 바람은 알맞게 불어오고 불어간다. 햇볕과 바람이 깨어놓은 풀꽃들은 곱기만 하고 그 길을 가는 산꾼들은 햇볕이 되었다가 바람이 되었다가 풀꽃도 됐다가 태초의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은 사심 없는 모습들이다. 차마 표현할 길이 없지만 고운 입자를 빛내면서 웃고만 있는 꽃잎이 사람의 마음에도 곱게 꽃물로 번져온다. 이렇게 곱게 마음에 밴 꽃물이 오래토록 지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람재에서 약 200m 오름길을 올라서면 여정봉과 삼성산이 연이어 나온다. 산행 난이도나 거리감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유유한 곳이다. 산행을 이어가는데 어려움은 없으면서도 해발 1000m고지를 오르내리는 곳이라 주변 산군이 순간순간 열리고 먼산 바라기에 그리움을 띄워보낼 수 있는 지형이다. 고산의 풍모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숨가쁘지 않게 길을 열어갈 수 있는 곳이라 계절이 주는 감흥에 더 즐겨 산길을 이어간다.

▲ 김두일 대한백리산악회 고문

오후 4시40분께, 전 대원이 호접의 날개처럼 가볍게 우두령(牛頭嶺)에 내려섰다. 고갯마루 절개지를 생태이동통로로 복원했고 소(牛) 형상 조형물을 세워 우두령임을 각인시켜 주는 곳이며, 질매재로도 불린다. ‘질매’는 ‘길마’의 방언이다.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기 위해 소나 말 따위의 등에 얹는 안장을 일컫는다. ‘질매재’라는 지명은 울산에도 있고 영호남에 걸쳐 두루 널려 있다. 양 끝단은 불룩하고 가운데는 평평한 길마, 질매재에 내려선 뒤 황악산의 수계를 모아 강을 이룬 감천에서 세심을 하고 김천 구성면의 세월이 오래된 산골 식당에서 대간 24구간의 회포를 풀어내었다.

비웠다가 다시 채워 더 아름다워진 오월의 산이었고, 막걸리의 풍미가 더 짙어지는 오월 산행이었다.

김두일 대한백리산악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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