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춤 씨름이라도 해볼까

▲ 옛날부터 씨름경기에서 우승한 선수를 장사라고 부르면서 상품으로 살아있는 황소 1마리를 주었다. 현재는 황소 모양의 트로피를 제작해 우승자에게 수여하고 있다. 사진은 1980년대 대회 우승 후 부상으로 받은 황소를 끌고 가는 손상주 장사. 통합씨름협회 씨름소개자료 발췌

씨름의 역사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씨름하는 장면이 그려질 정도로 오랜 전통을 지녔다.

4세기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만주의 고구려 고분 각저총과 5세기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보는 장천1호 무덤에는 씨름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이름이 있는데, 주로 각저(角抵), 각희(角戱), 상박(相撲)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다 15세기 이후로 ‘실홈’을 거쳐 ‘씨름’이 되었다고 전한다.

공식적으로 쓰인 씨름에 관한 기록은 조선 세종 때 제작된 <고려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사>에는 충혜왕이 환관들과 씨름을 즐겼다고 전한다. 또한 세종 때는 씨름을 장려했다고 전하며, 무예의 종목에 포함되기도 했다.

지역에 큰 축제가 열리면 빠짐없이 등장할 만큼 우리 민족이 대단히 사랑하는 민족 고유의 운동이다.

씨름은 때로는 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해 한때 금지시키기도 했다.

우리나라 전역에 다양한 형태의 씨름이 존재하고 있으나, 울산은 추석명절에 특히 많이 즐긴 것으로 보인다.

울산, 추석 명절에 씨름 특히 즐겨
서로 힘 모으는 ‘화합의 장’ 역할
1980년대엔 국민 스포츠로 인기

우리네 씨름은 지역에 따라 그 열리는 시기가 달랐다.

일제강점기의 자료이기는 하지만 <조선의 향토오락>(무라야마 지준, 1936)을 보면 추석명절 울산에서 얼마나 씨름을 즐겼는지 알 수 있다.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은 일본의 민속연구가로, 조선총독부의 촉탁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일제강점기 한국의 민속과 관련된 많은 조사 자료를 남겼다.

이 자료에 따르면 경기도와 충청도는 백중에, 전라도와 경상도는 추석에, 평안도와 함경도·황해도는 단오에 각각 씨름이 열렸다.

특히 울산지역에서 추석에 주로 행해졌음을 밝히고 있다.

▲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의 풍속화 모사복원품. 씨름하는 2명의 아이와 구경하는 아이, 심판이 그려져 있다.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일제강점기 울산지방 씨름대회의 통계와 입상자 통계는 울산에서 씨름이 활성화했음을 잘 나타내 준다.

당시 총독부는 조선에 대한 민속 및 풍습에 관한 조사와 분류를 했고 이를 토대로 통치수단을 강화했다.

씨름의 기술은 크게 손기술, 발기술, 허리 기술이 있으며, 실제 경기를 할 때에는 적절히 사용해야 한다.

대개 기술에는 상황에 따라 되치기를 사용할 수 있으며, 되치기를 통해 오히려 상대방을 넘어뜨릴 수 있다.

승부는 먼저 땅에 무릎이나 상체가 닿는 사람이 진다. 누가 먼저 땅에 닿았는지 판정하지 못한 경기를 개판이라고 부른다.

샅바는 허리와 다리에 둘러 묶어서 손잡이로 쓰는 천이다.

샅바 고리를 매는법에서 승패가 결정된 만큼 샅바는 매우 중요하다.

씨름 선수를 달리 샅바 잡이라 이르는 것도 샅바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씨름경기에서 샅바를 유리하게 잡으면 상대를 넘어뜨리기가 쉬웠다. 원래 흑색과 백색으로 구분해 사용하였으나, 1983년부터 청색과 홍색으로 바뀌었다. 컬러 TV 보급의 영향이었다.

40~50년 전, 맨몸으로 상대의 샅바를 잡고 씩씩대며 하나가 되었던 시절.

울산뿐만 아니라 전국의 씨름판에서는 재미있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콩뽑(꺽)기 해라!”(오른손으로 상대방 오른쪽 무릎을 콩 뽑듯이 당겨라(꺾어라). “떡가래 쳐라!”(오른쪽 다리로 상대의 왼쪽다리 바깥을 감아 넘겨라) “돌림배지기(돌배지기) 해라!”(상대 샅바를 잡고 돌면서 상대의 중심을 잃게 만들어 넘어뜨려라)

이런 응원 속에서 누가 봐도 빼빼 마르고 힘을 못 쓸것 같은 사람이 이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샅바를 잡은 상대 씨름 선수에게 귓속말로 “술 한 잔 사줄 테니 한번 져 달라”고 사정을 하여 이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사람은 승리한 기쁨에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했고, 이를 보는 관객들은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울산에서는 씨름을 잘하는 사람을 ‘장군’이라고 불렀다.

씨름은 애기씨름·중씨름·상씨름 순으로 3차례 이어졌다.

애기 씨름은 아이들이 하는 씨름으로 이기면 연필이나 문구류 등을 주었다.

중씨름은 나이제한이 없는 씨름으로 이기면 상씨름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상씨름은 중씨름에서 1~3번 정도 이긴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우승하면 황소 또는 황소 한 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을 상금으로 주었다.

하지만 울산이 급격한 산업화 물결을 타면서 ‘장군’도 사라지고 ‘샅바’도 점차 보기 힘들어졌다.

기성세대가 자랄 때만 해도 학교에 모래를 부어놓은 씨름장이 있어서 쉬는 시간이면 왁자지껄 모여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현대에 들어서 1980년 대 전성기를 맞아 국민스포츠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온 국민이 씨름을 통해 하나가 되기도 했다.

얼마나 인기가 많았던지 씨름 중계 때문에 9시뉴스가 미뤄지기 일쑤였고, 씨름 선수들은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로 군림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며 인기가 시들해지고, 모래판의 함성도 점점 잦아들어 이제는 추억의 경기로 사그라지는 분위기다.

최근 씨름의 인기가 급속도로 떨어져 프로 씨름경기는 더 이상 개최되지 않는다.

대학씨름대회를 비롯한 전국, 지방 단위의 씨름대회가 설날이나 단오 때 주로 열려 지상파를 통해 방영된다.

씨름을 통해 당당한 모습과 질긴 승부욕, 서로 힘을 모으는 아름다운 마음들을 보는 것은 행복이었다.

다가오는 추석을 맞아 울산의 씨름문화를 회상하면서 씨름놀이라도 해보는 건 어떨까.

아버지와 아들이 모래밭 대신 방안에 이불을 깐 뒤 바지 허리춤이라도 잡고 힘겨루기를 하다보면 부흥기를 맞지 않을까.

박철종기자 bigbell@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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