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2년 울산 중구 우정동 선일섬유 앞 광장에서 열린 전국씨름대회 결승전 장면. 1960~1970년대 절대강자였던 경남 마산 대표 김성률(검은 샅바·작고) 장사와 울산 대표 박두진(흰 샅바) 장사가 맞붙었다. 이 한판승부를 구경하기 위해 땡볕을 마다하지 않고 몰려온 시민들로 백사장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현 SK아파트 부지에 있던 선일섬유는 이전에 ‘울산직물’에서 상호를 바꾼 이후 SK에너지의 모태인 ‘선경직물’이 되었다가 1992년 선경아파트(현 SK아파트) 건설로 철거됐다. 사진 위와 아래에 있는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씨름도’ 중 일부이다. 사진 출처 <사진으로 본 울산 100년>

“씨름 안하나?” “씨름 함 하자!”
추석 무렵이 되면 울산사람들이 자주 했던 말이다.
씨름 한판 하자는 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여러 사람들의 중지(衆智)로 모아졌다.

울산에서도 그림 속 풍경처럼 추석이나 단오 등 명절에 힘꽤나 쓰는 장정들이 출전해 씨름판이 벌어졌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응원하며 흥겨운 잔치처럼 경기를 즐겼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의 ‘씨름도’를 보는 것처럼….
씨름은 민족 고유의 무예이자 놀이문화이면서, 마을의 단결을 다지고 풍년을 기원하는 일종의 축제이기도 했다.

 

울산에서 전국 규모로 처음 열린 씨름 대회는 시대일보(時代日報) 병영분국이 주최한 제1회 남선각희대회(南鮮脚戱大會)이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9월14일부터 16일까지 울산군 하상면 동천 사장에서 개최됐다. 울산군 하상면은 현재 중구 병영1동이며, 남선은 한반도 남쪽을, 각희는 씨름을 일컫는다.

이 씨름 대회는 1928년 태화강 중도(中島) 사장(沙場)에서 열린 울산남조선씨름대회와 쌍벽을 이루며 우리나라 씨름대회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중도 사장은 1928년을 기점으로 1960년대까지 울산의 씨름장으로 각광을 받아 왔다.
중도는 태화강에 있던 모래섬이었다. 139필 11만400여㎡(3만3397평)의 광대한 경작지에 관계경작인이 200여명(동아일보 1935년 8월5일자 3면 참조)에 달했다. 이곳에 일제강점기에 목조 구울산교(舊蔚山橋)가 설치됐는데, 다리를 기준으로 강북쪽이 울산교, 강남쪽이 성남교였다.

남창장과 언양장에서 열린 씨름도 유명했다. 추석날 오후 또는 다음날부터 시작해 3일동안 씨름을 했다.
특히 남창은 동해남부선이 지나가는 곳에 있어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씨름꾼들이 모여 들었다.
씨름장은 의용소방대에서 주관을 해 지역에서 형편이 조금 나은 집들과 주변 상인들의 추렴을 통해 경비가 마련됐다.
언양 남천(南川), 온양 남창천(南倉川), 온산 목도(目島), 두서 인보(仁甫)시장 등지의 사장에서는 응원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태화강 백사장에서 1964년 제20회 대회까지 열렸던 전국씨름대회는 이후 장소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울산공업센터 기공 이후 태화강 모래가 건설 골재로 반출되면서 모래섬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1965년 제21회 대회부터는 복산동에 있던 구(舊)공설운동장을 비롯해 동천 사장, 성남시장 빈터, 우정동 선일섬유 앞 광장 등에서 개최했다.
씨름은 우리나라 전역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지만 울산이 추석명절에 특히 많이 즐긴 것은 확실하다.  박철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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