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산을 이고 사는 사람들(4)가지산표범과 입포수

▲ 1960년 가지산표범. 영남알프스 최후의 표범이다. 매화무늬 털가죽, 날렵한 몸매, 치켜든 꼬리, 매서운 눈매를 가진 산중호걸은 이 사진 한 장을 남기고 우리곁을 떠났다.

필자가 영남알프스의 마지막 표범 사진을 입수하게 된 것은 엉뚱하게도 영남알프스가 아닌 경남 양산 천성산 비알이었다. 제2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천성산 계곡은 팔만 구 암자가 있었다는 설(說)이 전해올 정도로 그 품이 넓다. 천성산 오지마을을 찾아다니던 나는 29대째 내리 이곳에서 살아온 이성렬(82)이라는 퇴역 사냥꾼을 알게 됐다. 이씨는 짐승들의 발자국을 귀신같이 알아맞히는 발자국 빠꿈이로, 호랑이를 잡은 명포수 집안답게 눈매가 매섭다. 평소에는 평범한 농부로 지내다가도 사냥철에 접어들면 서릿발 눈알로 짐승을 쫓아 50관(187.5㎏) 멧돼지를 산에서 끌고 내려왔다.

영남알프스 마지막 표범 사냥한 포수는 부산포수
한쪽팔 물리는 악전고투 끝에 한마리 사살했지만
포수가 잡은 표범은 실제 밀렵꾼 올가미에 걸린것
수십년간 비밀 지켜온 ‘입으로 사냥한 최고 포수’

가당찮게 내리던 눈이 멈춘 날이었다. 산신제를 끝낸 나는 천성산 골짝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 양산 내원사 일주문을 열었다. 큰 머슴이라는 별명을 가진 길동무와 함께 푸짐한 먹을거리를 잔뜩 싸들고 이씨 집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일주문을 통과해 시오리 짚북 계곡 길을 곧장 거슬러 오르자 세상과 단절된 한듬마을이 나왔다. 고립무원을 깨우는 시오리 계곡 물소리는 저잣거리의 시름을 가시게 했다.

이씨가 사는 천성산 한듬마을은 마을 전체가 절 소유이다. 스무 가구 정도였던 종신형 민가는 뿔뿔이 흩어지고 지금은 노부부 한 가구가 유일하게 산다. 내가 귀신도 마다할 이곳을 고자 처갓집 드나들 듯이 하는 이유는 퇴역 사냥꾼이 은밀히 보관하고 있는 표범 사진에 이끌려서이다. 그동안 나는 표범 사진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오막살이집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번번이 허탕 칠 때마다 맹탕해진 분위기를 울주 천전리 각석마을 출신인 그의 아내가 누그려주곤 했다. 술을 한 잔 걸쳐 불콰해진 이씨는 드디어 표범사진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런데 사진은 이곳에 있지 않고 일주문 밖 외딴집에 있다는 것이 아닌가. 아이고, 두(頭)야!

나는 거동이 불편한 노닥다리를 업고 오막살이를 나섰다. 살가죽만 남은 노닥다리는 의외로 가벼웠다. 마치 고려장을 시켜놓은 늙은이를 구해 저승골을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세 개의 문과 열두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다. 등에 업힌 이씨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곧 잘했다. “저긴 범불 골짝이야. 범이 호시탐탐 노리던 데지. 담력 약한 사람은 눈에 불을 켠 범을 보기만 해도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질금질금 싸.”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계곡을 가리키며 중덜거렸다.

“삼촌과 부산포수랑 자주 드나들던 데야. 그 양반들은 봤다하면 두 번을 안 당겨. 눈매가 사나워 눈을 부릅뜨면 범이 고개를 숙이고 벌벌 기었어.” 그는 어릴 때부터 삼촌과 삼촌 친구였던 부산포수를 따라다니며 사냥을 익혔다. 천성산과 오룡산을 비롯해 경상도 전역을 돌며 사냥한 짐승은 부전시장 고깃집에 넘겼더랬다.

▲ 가지산표범을 해체했던 부산포수의 집.

등에 업힌 퇴역 사냥꾼의 흥미로운 입담에 무거운 줄 모르고 읍내 외딴집에 도착했다. 알고 보니 외딴집은 산에서 사냥한 짐승을 도육(屠肉)하던 아지트였다. 이씨는 허름한 다락방에서 유리 액자를 꺼내왔다. 색이 바랜 흑백사진이긴 해도 그런대로 상태는 온전했다. 액자를 열자 엽총과 탄띠를 걸친 포수와 점박이 표범 사진이 나왔다. 나는 점박이 표범을 보는 순간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매화무늬 털가죽, 날렵한 몸매, 치켜든 꼬리, 매서운 눈매……. 천년을 기다린 산중호걸이 왜 이제야 찾아 왔느냐고 쏘아붙이는 것 같았다. 은밀한 공간에서 촬영을 했던지 별다른 배경 없이 포획한 시기와 장소만 표기돼 있었다. ‘단기 4293. 12. 22 於 慶北 上北面 雲文山 上峯’ 매화무늬 표범이 잡힌 시기는 1960년 12월22일이었다.

“이 사진은 부산포수한테 받은 거야. 가지산 비알에서 두 마리를 봤는데 한 마리는 놓쳤다더군.” 이씨가 부산포수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포획과정은 그럴싸했다. 석남재 인근에서 표범이 먹다만 뼈를 발견한 부산포수는 가지산과 운문산을 추적했고, 운문산 상봉 바위틈에 숨어있는 두 마리의 표범을 발견해, 한 쪽 팔을 물리는 사투 끝에 한 마리는 사살을 하고 다른 한 마리는 놓쳤다. 부산포수는 상처에 좋다는 수탉 피를 상처에 바르고 부산으로 이송됐고, 짝을 잃은 표범은 밤마다 괴성을 지르며 마을 뒷산을 헤매고 다녀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볼이 홀쭉해진 이씨는 이어서 “범 사진 가지고 왔을 때 최 포수 망하겠구나 했지. 범 잡으면 망해. 경상남도 명포수 이달우 포수도 오룡골에서 통도사 노루 잡던 호랑이 잡아 망했지.” 영험한 범을 잡아 망조가 든 포수가 하나 둘 아니라는 것이다. “이 양반, 주디가 더러워. 얼마나 더러운지 죽이려는 사람도 꽉 찼었어. 몰이꾼들이 말야, 짐승을 이 양반으로 여기고 홀찌기탕을 해먹으려 할 정도로 인심을 잃었더라구.” 외딴집을 나서던 이씨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내게 사진을 건네주며 말했다. “산신이 액자 속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어. 임자 나섰을 때 넘기는 거야.”

해가 바뀐 이듬해, 부산포수와 안면이 있는 김덕동(오부자포수 막내) 씨의 안내로 부산포수 집을 찾아갔다. 인적이 뜸한 ‘하야리아부대’ 후문 골목길에는 오래된 목재건물들이 남아 있었다. 이웃에 사는 쌀가게 주인은 고인이 된 부산포수를 풍문으로만 아는 정도였고, 오히려 다리가 성하지 못했던 포수아들이 요절했다는 귀띔을 해주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2층 목재집은 천장이 내려앉고 곰팡이가 가득했다.

“군대 휴가를 나오니 아버지(김재한)가 범 잡은 부산포수 집에 가보라고 해서 갔죠. 최 포수는 사진을 찍기 위해 하꼬방 천장에 표범을 걸어놓고 있었어요. 이게 말로만 듣던 범이구나!” 표범을 처음 본 덕동씨는 적잖게 놀랐다고 한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2m 반은 족히 넘어보이는 표범이 걸려 있었는데, 희고 긴 일(一)자 꼬리가 환상적이었다고 기억을 했다.

덕동씨는 충격적인 사실도 밝혔다. 가지산표범은 부산포수가 사냥한 표범이 아니라는 것이다. “살티에 사는 홀갱이꾼(밀렵꾼) 목매에 걸려든 겁니다. 우리 아버지는 알고 계셨어요. 호피를 팔려던 살티 홀갱이꾼이 아버지한테 먼저 연락이 왔거든요.” 표범 포획과정의 정황들을 여차여차 꿰맞춰보면 이렇다. 표범은 살티마을에 거주하는 한 주민이 가지산 잣발등에 쳐놓은 올가미에 걸렸고, 주민은 수렵면허가 있는 부산포수에게 몰래 넘긴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잡은 것으로 속인 부산포수라는 사람은 보통 거간꾼이 아니다. 명포수가 아니라 방구석에서 범을 잡은 ‘입포수’가 아닌가. “그럼에도 부산포수는 엽총과 맹수용 실탄을 보여주며 자신이 악전고투 끝에 잡은 표범이라고 떠들고 다녔어요. 자신이 잡은 것처럼 사진을 찍어 돌리고, 리어카에 실어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며 떠벌리고 다닌 것이죠.” 의외의 사실을 안 나는 허망해진 몸을 언양 버스에 실었다. 매화무늬 표범을 목매로 잡았다는 살티 홀갱이꾼을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 배성동 소설가

그렇잖아도 몇 가지 의문은 들었다. 입수한 사진을 들고 다니며 영남알프스 일대를 수소문을 했지만 아무도 사진 속 인물을 알아보는 토박이들이 없었다. 좁은 바닥이라 황소만한 호랑이가 잡혔다고 눈덩이 소문이 자자할 텐데 죽은 듯이 잠잠했다. 또한 사진 하단 모서리에 적힌 ‘단기 4293. 12. 22 於 慶北 上北面 雲文山 上峯’ 표기 중에서 경남 상북면을 ‘경북’으로, 雲門山을 ‘雲文山’으로 오기한 것을 보면 이 지역에 밝은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연재에서 밝히겠지만 1960년 가지산표범이 감쪽같이 사라진 배경에는 호피라면 환장을 하는 홀갱이꾼들의 쟁탈전이 있었던 것이다. 구경꺼릴 만난 부전시장 사람들의 입소문은 천리를 갔다. 부산포수는 당대 명포수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만병통치약 호골(虎骨)과 천하별미 호육(虎肉)을 사려는 사람들로 아우성을 쳤고, 호피(虎皮)는 금값보다 더 비싸게 팔렸다.

반세기전, 영남알프스를 진호하던 가지산표범은 부산의 어느 허름한 창고에서 흑백사진 한 장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가죽은 가죽대로, 뼈와 살은 각각 도륙(屠肉)되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나는 매화무늬 표범을 가지산표범이라 명명하고, 건네받은 사진은 울산박물관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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